다큐멘터리, 그것도 중·단편 다큐멘터리만 모아 상영하는 영화제가 있다. 한국에서 유일한 중·단편 다큐 상영의 창이 닫혀서는 안 된다며 인디다큐페스티발이 문을 닫은 뒤 다큐를 아끼는 이들이 십시일반 모여 일으킨 영화제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반짝다큐페스티발(반다페) 이야기다.
지난 두 차례 개최에서 이 영화제는 프로그램북을 따로 내지 않았다. 영화제와 상영작 정보부터 소개글 따위가 두루 수록된 책자를 나와 같은 이라면 가장 먼저 찾을 터다. 2년 전인가. 첫 영화제를 찾아 프로그램북은 어째서 없느냐고 물은 일이 있다. 운영위원이 한숨을 푹 쉬며 말하기를, 돈이 있어야 책자도 만들고 인쇄도 할 것이 아니냐고 당연한 답이 돌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반짝이는 영화제는 정부며 지자체 지원금을 전혀 받지 않고 운영하는 자생적 영화축제로, 주머니 사정 또한 빤하디 빤하였다. 나는 수육을 못하면 곰탕을 끓이면 될 게 아니냐고 명한 어느 도망하는 임금이 된 듯한 기분으로, 이 영화제가 영영 책자 비슷한 것을 갖지는 못하겠구나 단념했었다.
그러나 올해 찾은 영화제엔 떡하니 프로그램북이 누워 있는 것이고, 무려 팔천 원의 가격으로 영화제를 찾은 이들에게 팔리고 있었다. 책 안엔 내 글 세 편을 포함해, 이 영화제와 상영작 하나하나를 애정하는 이들의 글이 가득 담겼다. 영화제는 평론가들에게 의뢰해 받은 프로그램 노트, 즉 짤막한 영화평을 따로 온라인에 노출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큐멘터리를 아끼는 이들이라면 평 또한 그렇게 애정하여 한 권, 한 권을 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와 글의 토양이 함께 졸아들기만 하는 이 무정한 시대에도 다가서 책을 사는 이들이 이따금 보이는 것이 나는 희망인가 했다.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프로그램북 표지 ⓒ 김성호
소외된 곳을 비추는 작은 불빛, 반다페와 다큐멘터리
이번 '독서만세'에서 나는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이라 이름 붙은 동명 영화제 프로그램북을 소개하려 한다. 책자 안엔 중·단편 다큐영화제의 특성상 매스미디어가 닿지 않는 수많은 현장, 존재하지만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공간, 무시되고 은폐되는 사건, 무엇보다 희미해져만 가는 목소리가 담긴 작품을 엿볼 수 있는 때문이다. 그를 공들여 소개하는 글들을 그저 아무렇게나 팽개쳐 잊히도록 할 수는 없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흘 간 모두 30편의 작품이 상영된 이번 영화제다. 그중 개막섹션에서 소개된 3편은 벨기에, 우크라이나, 스코틀랜드에서 들여온 작품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러시아-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주목할 만한 단편이다. <그 꽃은 조용히 서서 지켜본다>는 올해 선댄스영화제 단편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적 화제작이지만, 한국에선 따로 볼 기회가 없는 터였다. 소위 예술영화, 또 실험적인 단편이 정식 수입돼 극장상영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올해 반다페가 들여온 세 편의 작품 모두가 하나하나 그와 같아서, 개막섹션을 찾은 이들만이 세계사적 사건을 둘러싼 색다른 시선, 인식의 지평을 넓혀줄 목소리를 접할 수가 있었다.
지면의 한계 탓으로 셋 중 <그 꽃은 조용히 서서 지켜본다>만 이야기한다. 영화는 1930~40년대, 팔레스타인의 들꽃을 찍은 필름 아카이브를 재료로 한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인근 영상보관소에서 잠들어 있던 이 영상을 그리스-레바논-팔레스타인계 영화감독으로 글래스고에 거주하는 씨오 파나고팔리스가 입수하며 필름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띈다. 필름은 당시 영국령이던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에 의해 촬영된 것으로, 일대의 풍광을 즐기며 들꽃 등 자연을 담았다. 영화는 이를 재편집한 영상 위에 감독의 내래이션을 실었는데, 영화 내내 소외된 아랍 현지인이 마치 돌덩어리처럼 저 귀퉁이에서 아무렇게나 비춰지는 몇 장면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빚어낸다.
글을 쓴 박동수 평론가는 "팔레스타인인의 손으로 촬영되었어야 할 풍경은 스코틀랜드인에 의해 담기고, 팔레스타인에서 나고 자랐어야 할 감독은 스코틀랜드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며 "디아스포라의 민족에 의해 부활한 파시즘이 팔레스타인 땅의 영혼을 학살하는 기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풍경과 함께 기록된 이미지 배후의 역사적 아이러니를 우리 앞으로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언론이 비운 자리, 카메라가 지킨다
한국 언론이 비운 자리를 지키는 카메라들의 작품은 반다페, 나아가 한국 다큐멘터리의 주요한 경향이라 해도 좋다. 개발과 환경파괴, 경력단절과 실업, 좌우 극단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시민사회, 공동체의 해체, 장애, 동물권 등 다양한 문제를 조명한 작품이 이번 영화제에서 소개됐다. 이번 영화제에선 특별히 장애를 소재로 한 작품이 여럿 눈에 띄었는데, 영화제 기간 중 진행한 포럼에서 조이예환 운영위원이 "올해 누가 장애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조명해보자고 작정하고 돈을 풀었나"하고 우스갯소리를 던질 정도였다.
<만나다, 배우다, 얻다>도 그중 하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근무하는 활동가 황나라의 다큐 데뷔작이다. 장애인이란 이유로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인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장애인 야학을 중심으로 살핀다. 중증 장애인이 고등학교 이상의 중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 현실, 그리하여 검정고시를 치러야 대입자격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초·중등교육을 받는 일을 국민의 4대 의무로 정해둔 헌법의 이념과 민망하게 상치된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건너 붉은 벽돌집>의 안소연 감독은 프로그램 노트에서 "어렵게 손을 모아 열린 성인 장애인 교육을 위한 야학이지만, 중학교 과정을 마친 뒤 이어갈 고등학교 과정조차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며 "영화는 야학의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학교라는 공간과 성인 장애인 교육과정이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한국 중·단편 다큐 유일한 창, 닫히지 않기를
그저 명확한 사회적 주제를 가진 작품만이 영화제 문턱을 넘는 건 아니다. 공과 사를 오가며 개인적 심상을 담은 에세이 다큐부터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 다큐 또한 치열한 경합을 뚫고 공식초청 됐다. 성결대학교 영화영상학과에서 영상을 전공하는 박슬희의 <웰컴 투 마이홈>은 흔히 정상, 또는 표준이라고 여겨지는 가족의 틀 너머 새로운 형태의 가족 속에서 제 자리를 찾는 과정을 담은 특색 있는 다큐다. 엄마가 남자친구와 살림을 합치는 과정에서, 엄마의 남자친구의 아버지까지 함께 살게 된 감독 박슬희의 이야기가 영화적 재미와 함께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까지를 빚어낸다. 소위 '가족의 탄생'이라 할 만한 이 작품으로부터 스스로 '가족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묶어내는가' 질문하게 되었다는 관객이 적잖았던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프로그램 노트를 맡은 <소리없이 나빌레라>의 김시아 프로듀서는 "박슬희 감독은 이 특별한 동거의 시간을 자전적 다큐의 형식으로 풀어내며,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가족'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면서 "감독은 자신의 내밀한 기억과 감정, 망설임과 회복의 시간을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조심스레 내보이며, 자신의 삶 속 '홈'에 우리를 초대한다"고 적었다.
<제3회 반짝다큐페스티발> 프로그램북은 여느 영화제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소책자일 뿐이다. 영화제 현장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긴 했으나, 정식 출판되지 않은 탓으로 글을 읽는 이가 따로 구할 길 또한 막혀 있다. 275회차에 이른 '독서만세' 전 회차에 걸쳐 판매되지 않는 소책자를 소개한 건 공익변호사단체 '공감'의 자료집 등 단 몇 번 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자를 소개하는 건 이 작은 영화제 반다페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이 영화제가 더 작은 영화, 창작자, 그 카메라가 머무는 작은 현장과 사건에 불빛을 비추듯이, '독서만세'가 이들에게 그와 같은 빛을 비추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영화제에서 팔천 원에 판매한 이 책자를 두고 누군가가 '너무 비싸다'고 하는 말을 스치듯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이 책자에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내가 그러했듯 다른 이들의 글에서도 단 한 명이라도 더 작품에 다가서게 하려는 노력, 그 애정 깃든 마음이 묻어난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품는 건 글을 업으로 삼는 나와 같은 이에게도 정말이지 흔치 않은 일이 아닌가. 응원하는 글, 부응하는 작품, 그것이 만나는 귀한 순간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디자인과 편집을 맡은 이은혜 운영위원의 공이 지대하다 들었다. <레즈비언의 산부인과> 저자이기도 한 그의 공을 구태여 기록하는 건, 수고가 마땅한 보상을 얻지 못하는 이 시대에 기록이 귀한 의미를 발한단 걸 알고 있는 때문이다. 나는 또한 이것이야말로 반다페의 지향이기도 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부디 반다페가 다큐란 것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기를 바란다. 프로그램북 또한 그러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못 구해서 안달인 반다페 프로그램북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