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의심하는 눈, 흔들림 없는 언어

▲의어구심(疑語究心)의문스러운 언어를 끝까지 파고들어 마음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의미. 질문의 언저리에서 진심을 만나다. ⓒ 이명수
김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읽다 문득 멈춰 섰던 한 단어, '가마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가마니 위에 엎드려 울었다는 문장은 강렬했지만, 임진왜란 시기에 과연 '가마니'가 존재했을까 하는 의심이 일었습니다. '가마니'라는 단어에서 시작된 의문은 자연스럽게 내 직업의 본질로 이끌었습니다. 편집자는 단순히 텍스트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대의 숨결을 느끼고, 역사적 정확성을 지켜내는 사람입니다.
출판 편집자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야만 오류를 발견하고, 그 오류를 통해 더 정제된 문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문장이 유려해도 시대적 조건과 어긋난 표현은 곧 이야기를 시대를 배반하게 만듭니다. 이를 간과한 채 출간된다면, 책은 독자에게 신뢰를 주기 어렵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가마니'는 20세기 초 일본에서 도입된 용어였습니다. 어원은 일본어 'かます(카마스)'이고, 이를 짜는 틀 역시 1900년대 초에 일본에서 건너왔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섬'이나 '죽통'과 같은 전통 농구에 곡물을 보관했으니, '가마니'는 분명한 시대착오적 표현입니다.
저는 이처럼 문장 하나에도 의심을 품고, 끝까지 사실 관계를 추적해 들어갑니다. 때론 유난스럽다는 소리도 듣지만, 언어는 세밀한 감수성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작은 오류 하나가 언어생활의 무심함을 드러내고, 그것이 쌓이면 결국 말글살이의 품격을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소우주인 작품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언어의 정확성을 지키려는 마음. 그것이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틀린 줄도 모르고 쓰는 표현들을 하나씩 짚어 나간다면, 우리 글쓰기의 감수성과 책임감은 한층 단단해질 것입니다. 언어는 시대의 거울이자 정신의 골격입니다. 그것이 흐트러질 때, 사고의 방향도 함께 흔들립니다.
말글살이, 어디서 흔들리는가
저는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출판 편집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수천 권의 원고를 넘기며, 문장들과 숨결을 나눠왔습니다. 원고 읽기는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 이상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함께 읽어 내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원고 검토는 늘 가장 치열한 과정이었습니다. 한 문장을 매만지며 밤을 지새운 경험, 단어 하나에 마음을 쥐어짜는 고통. 그 시간을 저 또한 지나왔기에 어떤 글이라도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매번 한 사람의 사유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여유롭지 않습니다. 교정 작업은 밀려 있고, 출간 일정은 촉박하며,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결국 저는 스스로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몇 장만 넘겨봐도 대략적인 수준은 감지됩니다. 맞춤법이 흐트러지고 문장이 뒤엉킨 원고는, 설령 주제가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그런 원고는 시간만 앗아가고, 편집자의 인내심을 끝까지 시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책으로 엮어도 결과는 대개 허망했습니다. 정성을 다했지만 독자에게 닿지 않았고, 고생은 고생대로 남았습니다.
요즘은 소셜미디어의 영향으로 문장부호의 혼용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물결표(~)는 '안녕~'처럼 말을 길게 끄는 데 흔히 쓰이지만, 원래 물결표는 의미 생략이나 대조를 표현하는 부호입니다. 문장의 흐름에는 말줄임표를, 의미 전환에는 물결표를 써야 합니다. 이러한 기초 구분이 정확한 문장을 만듭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늘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 선생을 떠올립니다. 그는 느낌표를 두 개 이상 쓰는 것을 금기시했습니다. '글의 품위는 부호 하나로도 무너질 수 있다'는 철학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편집자나 기자가 이를 어기면 가차 없이 지적했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규범이 아니었습니다. 표현의 질서와 언어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긴 원칙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 정신을 좇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문장은 감정의 배출구가 아니라, 사유의 구조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모티콘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글도 많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ㅋㅋ'나 'ㅠㅠ' 같은 표현들이 책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독자에게 가벼운 인상을 줄 수 있으며, 전문성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출판물은 소셜미디어와 달리 더 정제된 언어를 요구받습니다. 마치 카카오톡 메시지를 옮겨온 듯한 장난스러운 문장들. 이런 글은 아직 책으로 엮을 준비가 되지 않은 글입니다.
출판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섭니다. 독자와의 약속이며, 저자 자신의 문장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 마음 없이 보내온 원고는, 아무리 미안해도 가차 없이 제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특별히 눈여겨보는 것은 어휘가 풍부한 원고입니다.
원고뿐만 아니라 사람의 말에서도 어휘 구사력을 중요하게 봅니다. 언젠가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윤택이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을 보고 "윤슬이 참 아름답네"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그 사람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이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아름다운 우리말입니다.
언어의 오류가 사고를 뒤흔들 때
출간된 책이나 원고에서 자주 발견되는 오류 중 하나는 '명사+하다' 형태의 자동사 문장에 '시키다'를 붙여 타동사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스스로 한 일을 누군가에게 시킨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어색하고, 자칫 사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러한 오류는 '시키다'라는 표현이 주는 명령적이고 강조적인 어감 때문으로 보입니다. 말을 더 강하게, 분명히 전달하고자 하는 심리가 개입되면서, 자동사로 써야 자연스러운 문장에도 무심코 '시키다'를 붙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화자의 감정이 문법을 앞서는 순간, 문장의 자연스러움은 깨지고 진실성도 손상됩니다. '회의를 진행시켰다' 대신 '회의가 진행되었다'라고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전자에서는 마치 누군가가 회의를 억지로 진행하게 했다는 뉘앙스가 있지만, 후자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나타냅니다. '말의 격식'은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 사고의 질서를 지키는 일입니다.
이는 단순한 말버릇이 아닙니다. 사고의 구조를 흔드는 문제입니다. 언어는 생각의 뼈대입니다. 문법의 흐트러짐은 곧 사유의 흐트러짐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사용하는 단어들 중에는, 실제 의미와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옥석구분(玉石俱焚)'은 귀한 것과 천한 것이 함께 불에 타는, 비극적 상황을 뜻합니다. 흔히 '옥석을 가려낸다'는 긍정적 의미로 오해하지만, 정반대 뜻입니다.
여러분은 '애환을 위로하다'라는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애환(哀歡)'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 포괄하는 말입니다. 슬픔은 위로할 수 있지만, 기쁨을 위로한다는 건 언어적으로 모순입니다. '난상토론' 역시 부정적 의미로 오해되는 대표적 표현입니다. '난잡한 토론'쯤으로 여기지만, '난상(爛商)'은 '충분히 무르익도록 논의한다'는 뜻으로, 오히려 건설적 토론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거리 간판에서 흔히 보이는 맞춤법 오류도 많습니다. '순댓국'은 사이시옷이 들어가야 맞지만 '순대국'으로 잘못 표기되는 경우가 많고, '아귀찜' 또한 '아구찜'으로 적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언어는 사고의 거울입니다. '아귀가 맞는다'는 말처럼, 생각도 말도 정확하게 '아귀'를 맞춰 써야 합니다.

▲멱진구박.참된 것을 찾고, 거칠지만 숨은 보석(璞)을 구한다. 진리를 찾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참된 자아를 구한다는 의미. ⓒ 이명수
매일 교정지를 넘기며, 나는 단순한 오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의 신뢰를 지키는 전사처럼 싸우고 있습니다. 한 문장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그로 인해 책의 신뢰도는 높아지고, 독자들은 더 나은 정보를 얻게 됩니다.
편집자의 눈은 흔히 '매의 눈'에 비유됩니다. 콩알만 한 눈으로 300미터 상공에서 쥐 수염까지도 포
착하는 그 시선. 저 역시 원고를 넘길 때마다 그런 눈을 가졌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퇴근길 셔틀버스 안에서 수첩에 이렇게 썼습니다.
'교정지 위를 맴도는 편집자의 눈은 공중에서 선회하는 해동청 보라매와 같다. 흐릿한 글자 하나, 비뚤어진 자모 하나도 그저 지나치지 않는다. '있다'와 '잇다' 사이의 숨결 같은 차이도 날카롭게 가려내고, 쉼표 하나의 방향이 어긋나도 매의 예리한 눈동자는 번뜩인다. 오탈자는 편집자에게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반드시 포획해야 할 사냥감이다. 오류가 숨었다고 믿는 순간, 이미 그 발톱 아래 있다.'
물론, 이건 저의 바람일 뿐입니다. 저는 매일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교정지와 씨름하지만, 책이 출간되면 사냥감을 놓친 늙은 매처럼 자주 초라해집니다. 오류는 생각보다 영리하게 숨어 있다가, 교정지를 넘긴 순간 비웃기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냅니다.

▲편집자의메모수첩이 글은 퇴근길, 셔틀버스 안에서 시작됐다. 생각은 바람 같아, 날아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걷다가도 멈춘다. 메모는 글쟁이의 숨결이다. ⓒ 이명수
문해력의 추락, 민주주의의 균열
우리는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 자부해 왔습니다. 그 자부심 덕분에 빠르게 문맹을 해소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읽을 수 있음'과 '이해할 수 있음'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중학교 교사였던 한 저자는 문해력 관련 강연에서 이런 일화를 전했습니다. '무료하다'는 표현이 나왔을 때, 한 학생이 "공짜라는 말인가요?"라고 되물었습니다. 표지판의 '중식 제공'을 '중국요리 제공'으로, '우천 시 장소 변경'을 '우천시(雨川市)'라는 지명으로 오해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웃기지만, 웃음 뒤에 쓴맛이 남는 이야기입니다.
2024년 OECD 국제성인역량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언어 능력 점수는 249점으로, OECD 평균
(260점)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10년 전보다 24점이나 하락한 결과는 더욱 충격적입니다. 학생 때는 국제학력평가에서 상위권이지만, 성인이 된 후 문해력은 급격히 저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해력 저하는 정보의 비판적 수용 능력을 약화시키고, 왜곡된 정보와 가짜 뉴스에 취약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확인되지 않은 허상에 사로잡혀 이성이 아닌 감정에만 기대어 아스팔트 위에서 격렬한 목소리를 내기에 이릅니다. 언어의 기초가 무너지면, 민주주의의 기초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언어는 곧 우리 자신이다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花美心)십자가를 닮은 산딸나무꽃과 깊고 고혹한 향기의 쥐똥나무꽃. 하나는 신성한 이름을, 다른 하나는 억울한 이름을 가졌다. 그래도 꽃은 묵묵히 피어난다. 이름보다 향기와 형상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 이명수
방송에서도 잘못된 말을 바로잡지 않다 보니, 많은 사람이 그 표현이 잘못인 줄도 모른 채 무심히 따라 씁니다. 물론 방송 매체뿐 아니라 교육, 가정, 인터넷 등 다양한 경로가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주시경 선생은 "말과 글을 정리하는 일은 집 안 청소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집이 어지러우면 마음도 어지럽고, 말이 흐트러지면 삶 또한 뒤죽박죽됩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썩은 사과 하나가 상자 안의 다른 사과들까지 모두 썩게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작은 언어의 오류 하나가 사회 전체의 표현을 흐릴 수 있습니다. <논어>에는 "명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 말의 먼지를 털고 문장의 결을 다듬는 노력을 시작하면 어떨까요. 이제 여러분도 문장을 쓸 때, 한 번 더 생각해 보세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문맥에 맞게 사용하는지 점검하세요.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올바른 언어 사용은 단순한 규칙 준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모두가 언어의 파수꾼이 되어 봅시다.
언어는 단지 전달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다리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가장 조용한 방식입니다. 우리가 쓴 문장이 결국, 우리 자신입니다. 작은 표현 하나라도 제대로 알고 쓰려는 그 태도가 결국 우리 삶의 품격을 지켜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