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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월 3일 대통령 선거 투표일이다. 나라의 앞날을 결정짓는 큰일이라 뉴스에서는 아침부터 투표소 앞에 늘어선 줄을 보여줬지만 내 마음 한구석은 근처 역에서 열리는 5일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날과 투표일이 겹친 오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난주 사 먹었던 옥수수빵이 먼저 떠올라 5일장이 열리는 오늘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사전투표를 미리 해두었기에 이런 소박한 욕심을 따라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죄책감은 없었다.
보통은 한낮이 돼야 가는데 이번에는 오전 9시쯤 일찌감치 시장으로 향했다. 본 투표일이라 북적일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시장은 고요했다. 오일장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테이프 장사의 트로트 노래가 선거송을 대신해 흐를 뿐이다.
흥겨운 노래를 들으며 옥수수빵이 있는 시장 맨 끝까지 천천히 걸으며 장터를 구경한다. 화분, 통닭, 야채, 과일, 생선, 도넛 가게 등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막 좌판을 펴는 상인도 보인다. 나는 이런 시장 특유의 삶 냄새를 좋아한다. 정치는 멀게 느껴지지만 이런 장터 풍경은 피부에 와닿아 삶의 활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살 먹거리는 옥수수빵과 상추 두 가지. 3000원이라고 쓰인 커다란 옥수수빵 하나를 사고 발걸음을 돌린다. 내가 상추를 사는 곳은 입구에 있는 할머니 노점상이다. 90살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는 집에서 길렀을 법한 야채 몇 가지를 내놓고 파는데 많이 필요 없으니 조금만 달라고 해도 봉지 가득 담는다. 그렇게 2000원이다.
지난 장날엔 계획에 없던 과일을 사는 바람에 들고 오기 힘들었던 터라 이번에는 두 눈 꾹 감고 옥수수빵과 상추만 사고 돌아섰다. 두 가지만 사들고 오는데도 마음이 풍성하다. 시장에서 집으로 연결된 길은 나무숲이 우거진 오솔길이다. 늘 오가는 길인데도 오늘은 왜 이렇게 마음이 따뜻하고 여유가 있는 것일까. 오늘은 어떤 시비가 붙어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져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시원한 오솔길을 지나며 무더운 여름날 텐트 치면 좋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빨리 가서 옥수수빵이랑 차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집 앞까지 왔는데 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 열쇠가 없었다. 놀란 마음에 가방을 뒤지고 주머니를 여러 번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없다. 식은땀이 흘렀다. 빵 봉지 야채 봉지 속까지 이리저리 뒤졌지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몇 번을 확인했지만 없다.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걸어온 길을 되짚기 시작했다. 가방 깊숙이 넣어둔 열쇠가 없어질 리 없는데 하면서도 다시 장터로 향했다. 되돌아가는 길이 묘하게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열쇠를 잃어버렸다. ⓒ kellysikkema on Unsplash
나는 물건을 많이 잃어버린다. 잃어버리지 않으면 내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수없이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지갑이나 돈을 찾지 못할 때는 화가 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중요한 열쇠를 잃어버렸는데도 말이다.
왔던 길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 혹시라도 열쇠가 떨어져 있지는 않을까 눈을 씻고 찾았다. 걱정과 아쉬움이 섞인 발걸음이 조금 무거웠지만 어쩐지 마음 한편에는 이런 길이 인생에도 있지 않나 싶었다. 뭔가를 놓치고 나서야 다시 돌아보게 되는 길.
되돌아가는 그 길 위에서 문득 든 생각은 열쇠처럼, 살면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되돌아가지 않았던 건 아닌지... 스쳐 지나간 사람, 흘러간 기회, 말하지 못했던 진심, 양심을 버리고 부끄러웠던 적은 없는지. 살아가는 길에도 그런 ' 잃어버린 것들'이 있었을 텐데. 물건은 찾으려고 돌아가면서 마음을 찾기 위해 되돌아간 적은 있었는지... 혹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닌지.
짦은 거리에 많은 생각들이 다니고 있었다.
그사이 장터에 도착해 열쇠를 잃어버렸을 장소로 추정되는 상추가게로 향했다. 할머니는 안쪽에만 앉아계시니 잘 모를 테고 누군가 줍지만 않았으면 그대로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근처에서 열쇠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할머니 여기서 열쇠 못 보셨어요?"라고 하자 할머니는 웃으며 "여기 이거" 하고 열쇠를 건넸다. "떨어진 거 보고 내가 챙겨놨다. 주인이 찾으러 오겠지 하고. 집에 못 들어가잖아 열쇠가 없으면"이라고 말하신다.
그 말에 마음이 뭉클했다. 한참 찾고 헤매던 열쇠가 따뜻한 손길 안에 고이 있었다니... 지나쳤던 손님의 작은 물건 하나를 소중히 지켜준 마음. 그 마음 덕분에 나는 중요한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열쇠를 찾아서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 다른 마음이다. 열쇠 하나를 찾으러 간 길이 어쩌면 삶의 중요한 문을 여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문은 혼자선 열 수 없고 어떤 열쇠는 타인의 따뜻한 마음 안에 있다는 걸 배운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열쇠를 찾으러 가는 길, 그 길 위에서 잠시 멈춰 돌아본 내 인생의 풍경은 잃어버린 열쇠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를 되새기게 해 주었다. 늘 그렇듯 때로는 잃어버려야 돌아볼 수 있고, 되돌아가는 길에서 비로소 깨닫는 것들이 있다. 인생도 그렇다. 꼭 필요한 열쇠는 언제나 손에 쥐어져 있는 것만은 아닐 테니까.
옥수수빵을 먹으면서도 베란다 창밖으로 자꾸 시선이 향한다. 투표소가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들어가고 나올 뿐 바빠 보이진 않는다. 방송에선 실시간으로 투표율을 알리는 뉴스가 나온다. 오후 4시 기준 투표율 71.5%. 투표를 독려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분주하다. 오늘은 3년 만에 하는 조기 대선 투표일.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면 다시 찾을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