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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청년연합(1983-1992)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맞서 공개적인 정치투쟁을 벌였다.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 민담에 두꺼비는 뱀에게 대항했다가 잡아먹히지만 뱀의 뱃속에서 두꺼비 알이 부화해 뱀을 죽이고 그 자양분으로 수백 수천의 새끼 두꺼비들이 탄생하게 한다. 민청련 활동 중에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에 많은 민청련 두꺼비들이 세상을 떠났다. 윤석열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광장의 젊은이들은 아마도 그들 두꺼비들의 후손이 아닐까. 민청련 두꺼비들이 살아냈던, 때로는 애틋하고 때로는 안타까운 삶의 흔적들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32세 총각이 첫 연애편지를 썼다. 당시 풍습으로는 노총각이었다. 결혼 평균 연령이 남성 27세, 여성 24세이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편지 받을 여성은 26세였다. 여섯 살 차이,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었다.

편지를 쓴 시점은 1978년 5월 15일 월요일 깊은 밤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청년은 공장 건물 기관실 한 켠에 들여놓은 책상 앞에 앉았다. 스프링 대학 노트에서 빈 용지를 뜯어냈다. 우둘투둘 찢겨진 부분을 칼로 반듯이 잘라냈다. 검은 색 볼펜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기관실 실내는 보일러가 내지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보일러에 내장된 팬, 버너, 펌프 등이 각각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굉음이 온 실내를 꽝꽝 울렸다. 청년은 "시끌덤벙하기 짝이 없다"고 묘사했다. 귀가 완전히 먹먹해질 정도였다. 적응해야만 했다. 맨처음에는 고통스럽더니 이제는 견딜만하다고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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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편지를 쓰는 한편으로 이따금 보일러 압력 눈금을 들여다보았다. 압력을 5kg/㎤ 정도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압력이 기준치를 올라가면 부득이 기계를 정지시켜야 한다. 기계가 멈추면 작업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일시적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일러 압력이 이따금 높아지고 있었다.

청년은 보일러 직공이었다. 서울 성북구 월곡동에 염색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장위동 들어가는 방향으로 대로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취업한 염색공장이 위치해 있었다. 그는 기술자였다. 보일러 분야만이 아니었다. 냉동, 고압가스, 기계, 열관리, 위험물 분야 등의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 취업하기도 쉽고, 노동과정 속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근무 시간은 야간이었다. 오후 6시반에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 3시까지 8시간 30분 동안 기관실에서 보일러 작동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새벽 3시부터는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7시까지 잠을 자고, 8시에 퇴근했다. 그리고는 다시 같은 날 저녁 6시반에 출근해야 했다. 하루 3교대로 야간 근무를 되풀이하는 고된 일이었다.

 김근태의 연애편지 1978년 5월16일자 첫 페이지. 스프링으로 편철된 공책에서 용지를 뜯어냈다. 들쭉날쭉 찢어낸 부분을 문구용 칼로 반듯이 잘라낸 흔적이 있다.
김근태의 연애편지 1978년 5월16일자 첫 페이지. 스프링으로 편철된 공책에서 용지를 뜯어냈다. 들쭉날쭉 찢어낸 부분을 문구용 칼로 반듯이 잘라낸 흔적이 있다. ⓒ 민청련동지회

보일러 직공 김근태의 연인 옥순이

이 보일러 직공은 노동운동 진출을 결심한 지 4년 차를 맞는 김근태였다. 그는 첫 문장을 "옥순이를 생각하며"라고 썼다. '옥순'이가 그녀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성의 본명이 아니었다. '인재근'이 동일방직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을 때 사용한 가명이었다.

동일방직 사건이란 1976-1978년 농성, 파업, 시위, 해고, 구속 등을 되풀이하던 민주노동조합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인재근은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노동 간사로 일하면서 그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돕고 있었다. 특히 1978년 3월 36일 여성 노동자 6인이 여의도 부활절 연합예배 새벽기도회 단상에 뛰어 올라가 50만 군중 앞에서 노동운동 탄압을 폭로한 사건 이후에, 인재근도 배후에서 연루됐다는 혐의로 수배를 받고 있었다.

인재근은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73학번이었다. 재학 중에 교내 이념 써클인 '새얼'에서 사회의식에 눈을 떴고, 대학을 마친 이후에 노동운동으로 나아가기를 결심한 여성이었다.

김근태는 또박또박 글씨를 썼다. 정성들인 글씨였다. 꽃무늬나 귀여운 애니메이션이 인쇄된 예쁜 편지지는 아니었지만, 단정한 글씨 덕분에 깨끗한 이미지를 주었다. 맞춤법이 정확하고 적절한 간격으로 띄어쓰기를 한 덕분이기도 했다. 첫 문장은 들여쓰기를 하고, 필요한 곳에 쉼표와 마침표를 찍었으며 적절한 곳에서 문단 나누기를 했다. 잘 교육받은 사람의 세련된 필적이었다.

김근태는 둘이서 함께 했던 데이트에 대해서 말했다.

참 어제 기분 좋더라. 왜 있지, 그냥 날아오르는 기분. 나무도 좋고, 산도 좋고, 사람도 좋고, 여자도 좋고. 좋을시고. 약간 술에 취하고 또 옥순이한테도 취해서, 옥순이를 번쩍 들어올려 안을 때, 내 심장 마구 푸드득거리지 않겠어. 참 떨리더구만. 세상에 무서워서 떤 적은 있지만 사람이 좋아도 떨리는 모양이야. 떨려서 얼른 내려놓았지 뭐야. 그러니까 이젠 또 아쉬워지데. 그래 얼른 또 번쩍 올려 안았지. 에이 그런데 그게 산이어서 내리막길이어서 내려놓지 않을 수 없었지. 놓기는 싫었지만 둘 다 함께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려놓은 거야. 그 내리막길 아니었으면 얼마동안 들어안고 갔을텐데. 공장에 와서도 밤 1시인가. 그때쯤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더군.

옥순이로 불린 인재근

데이트 장소는 도심에서 가까운 북한산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산에 올랐다. 데이트를 한 '어제'란 5월 14일을 가리킨다. 일요일이었다. 늦은 봄 날씨였다. 이날 남부지방에서는 30도가 넘는 한낮 기온으로 때 이른 여름 더위가 찾아왔지만, 서울 최고 기온은 28.9도였다. 평년보다 6~7도가량 높아서 초여름 기분을 느꼈고 날씨가 화창했다. 나무도 좋고, 산도 좋았다고 한다. 게다가 약간 술도 마셨고, 연인까지 함께 했으니 김근태의 기분은 들떠 올랐다.

내리막 길 어느 즈음에 젊은 여성이 건너기에 좀 어려운 곳이 있었나 보다. 김근태는 옥순이를 번쩍 들어 올려서 안았다. 만난 지 오래되지 않은 것에 비하면 과감한 스킨십이었다. 김근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의 표현을 따르면 푸드득 푸드득거렸다. 온몸이 떨렸다. 무서운 영화를 보거나 무서운 얘기를 들을 때 떤 적은 있지만, 사람을 몹시 좋아해도 떨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는 옥순이에게 취하고 말았다. 내리막길만 아니었으면, 둘 다 함께 넘어질 것 같은 위험만 없었더라면, 얼마간 그대로 안은 채 길을 갔을 것이다. 아쉬웠다. 한 번 더 들어 안았지만 내려놓지 않을 수 없었다.

취한 듯 들뜬 기분은 오래 지속됐다. 옥순이와 헤어져 공장에 되돌아온 뒤에도, 한밤중에 기관실에서 보일러를 돌보며 편지를 쓰는 때까지도 그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김근태는 옥순에게 보낸 세 번째 연애편지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같은 해 5월 28일자 편지에서였다. 그는 고백했다. "나, 옥순이 좋아하고 있어. 또 아마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라고 썼다. 명시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전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프랑스 시인 엘뤼아르를 빗대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1년 전 쯤 불란서 시인 엘뤼아르의 시 몇 편을 읽은 적이 있어. 이 사람은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나섰던 사람으로 20세기 중엽의 위대한 시인의 하나였다고 해. 그 사람의 싯귀는 다 잊어버렸지만 엘뤼아르 시집 서문에 나오는 몇 마디가 생각이 나는군. 이 사람에게 갈라라는 부인이 있었어. 이지적이며 동시에 활달한 대단한 미인이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육감적인 여자가 아닐까 추측이 되는군. 그 시인이 이 여자를 사랑할 때 자신은 구속감을 느꼈고, 희생을 요구하는 생활이었고, 또 인내가 필요로 되었대.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은 자유를 댓가로 지불해야만 성립이 되었던가 봐.

 김근태가 연애편지에서 인용한, 폴 엘뤼아르의 시집 <이곳에 살기 위하여> 표지.
김근태가 연애편지에서 인용한, 폴 엘뤼아르의 시집 <이곳에 살기 위하여> 표지. ⓒ 없음

엘뤼아르의 시를 읽었다고 한다. 김근태가 읽은 시집은 <이곳에 살기 위하여>(민음사, 1974)인 것 같다. 폴 엘뤼아르가 짓고, 오생근이 한국어로 옮긴 124쪽의 자그만 시집이었다. 28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는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에 영감을 준 것으로 유명한 <자유>도 포함되어 있다. 2차대전 중에 나치에게 강점된 프랑스 전역에 영국 항공기를 통해 공중에서 무수히 살포됐다는 그 시 말이다.

엘뤼아르는 1920년대 유럽을 풍미한 초현실주의 예술 사조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혁명과 저항의 시인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독재자 프랑코 진영에 맞서 인민전선에 가담했고, 2차대전 때에는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에 맞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직접 참전했다. 인간의 고통과 형제애를 다룬 <시와 진실>(1942), <삶의 가치>(1944) 등의 작품집은 전쟁 기간 중에 비밀리에 유포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근태는 시인의 문학적 성취와 진보적 삶에 공감했던 것 같다. 그에 더하여 시인이 겪은 사랑에도 눈길을 주었다. 엘뤼아르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여성은 갈라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러시아 여성 엘레나 쟈코노바였다. 나이 열일곱 때부터 30대 초반까지 뜨겁게 사랑하던 동갑내기 여성이었다. 갈라는 시인의 문학에 찬사를 보냈고, 또 정직한 비평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딸도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분방했다. 시인은 그녀와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구속감을 감내해야 했고, 희생과 인내를 요구받았다고 한다. 결국 시인은 첫 사랑을 잃었다. 갈라는 10년 연하의 신진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사랑에 빠졌고, 엘뤼아르의 곁을 떠났다. 갈라에 대한 사랑은 자유를 대가로 지불해야만 성립될 수 있었다고, 김근태는 시인의 사랑을 평했다.

 김근태가 높이 평가한, 해방감과 자유스러움을 동반한 폴 엘뤼아르의 두 번째 사랑 누쉬.
김근태가 높이 평가한, 해방감과 자유스러움을 동반한 폴 엘뤼아르의 두 번째 사랑 누쉬. ⓒ 만 레이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이기를

김근태는 옥순이에게 말했다. 우리의 사랑은 갈라와 같은 것이 아니라, 시인의 두 번째 사랑과 같기를 바란다고. 엘뤼아르의 두 번째 여성은 누쉬라는 애칭을 가진, 프랑스인 배우이자 모델 마리아 벤츠였다. 누쉬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뮤즈라는 호칭을 받았다. 화가 피카소와 사진작가 만 레이의 작품 모델이 되는데 기꺼이 동의했고, 그 자신이 초현실주의 콜라주를 제작하기도 했다.

나이 40에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된 시인은 그후 12년간, 아내와 사별하기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 시인은 누쉬와 사랑을 나누면서 어떤 구속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해방감과 자유스러움을 느꼈노라고 고백했다. 김근태는 시인의 고백을 들으면서 "퍽 감동이 되었다"고 옥순이에게 토로했다. 시인의 내면을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근태는 사랑과 애착은 다른 것 같다고 편지에 썼다. "옥순이 하고 나 하고의 그것은 우리를 구속하고 희생을 바쳐야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둘 모두를 자유롭게 하고 충만케 해주는 그런 것이 되기"를 바란다고, 편지지에 꾹꾹 눌러 썼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임경석은 역사학자입니다.


#김근태#인재근#민청련동지회#2025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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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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