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사적인 일본>이라는 책을 통해 한일 독자들 간에 솔직한 대화의 장이 열리길 바란다는 나리카와 아야 ⓒ 나리카와 아야
나리카와 아야(成川 彩).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지난해 11월 5일, tvN <벌거벗은 세계사> '중국, 일본, 미국에 배신당한 땅 오키나와' 편을 시청했을 때였다. 박삼헌 건국대 일어교육과 교수의 강연으로 오키나와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소개되는 가운데, 나리카와 아야도 패널로 출연해 시청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특히 전세가 기울자 '히메유리 학도대'를 남겨둔 채 도주한 일본군의 이야기가 나올 때, 그는 다른 패널들과 함께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고베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일본의 유력 일간지 <아사히신문>에서 2008년부터 10여 년간 문화 담당 기자로 활동했다. 2017년 퇴사 후에는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다. 한국과의 인연은 '영화'에서 시작됐다. 이창동의 <박하사탕>, 오멸의 <지슬>, 장준환의 <1987> 등 한국 영화 속에서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배웠다고 말한다.
"무작정 외우는 역사보다, 영화를 통해 만나는 진실이 훨씬 오래 남았어요."
그는 올 초, 동국대학교에서 일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첫 고려대 어학연수 이후 세 번째 유학이었다. 논문 주제는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의 영화 교류'. 한일 양국을 오가는 동안 틈틈이 문화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며 방송 출연, 통번역, 강연 등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사이, 2023년에 학봉상(서울법대 주관, 일본연구소 협찬) 언론보도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그가 가장 애정하는 지역은 '제주도'다.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 때문은 아니다. <제주4·3평화기념관>을 일본 가족들과 함께 찾았던 기억이 깊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향한 아픈 역사를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날, 말보다 긴 침묵이 가족 사이를 지나갔어요."

▲<지극히 사적인 일본> 표지 ⓒ 틈새책방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그가 최근 책 <지극히 사적인 일본>(틈새책방 펴냄)을 펴냈다. 이 책은 일본 내부의 섬세한 성찰이자 고백이다. 한국인이 가장 궁금해할 질문들도 피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인 쇼와 천황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일본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현실' 등을 담담히 소회하듯 풀어냈다. '잔혹했던 전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일본 내 여론도 담아냈다. 가수 요조가 추천사를 쓴 것도 흥미롭다.
그런 솔직함 때문일까. SNS상에서 일부 일본 네티즌이 쓴 '매국노'란 댓글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는 그는 "그럴수록 눈치 안 보고 그냥 쓰는 게 정답"이라고 말하는 당찬 면모도 보였다.
한일 간 정서 차이에서 비롯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책에 녹여 눈길을 끈다. 일본과 한국의 '혼밥' 문화 차이처럼 일상적인 정서의 간극을 짚어낸 대목에서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그는 "일본은 원래 혼밥·혼술이 흔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눈치 보이는 일"이라며,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가 오히려 일본보다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끈 이유에 대해 짚으며, 주인공이 '당당하게 혼밥하는 모습'이 한국인들에게 어떤 문화적 차이를 느끼게 하는지 흥미롭게 풀어냈다.
이처럼 <지극히 사적인 일본>은 한일 사이에 놓인 가깝고도 먼 거리를 조금이나마 좁힐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 소통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메일을 보냈다. '당장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다'고. 다음은 그와 서면으로 주고받은 이야기다.
일본과 한국,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의 시작
- 아버지가 잡지기자 출신이라고 알고 있다. 글과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었을 듯한데.
"기자가 되기 위한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잡지기자였던 아버지와 어릴 때부터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글을 쓰면 종종 아버지가 봐주셨고, 그러는 사이 늘 책과 신문을 가까이하며 자랐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항상 '주변과 달라도 괜찮다' '주변과 맞춰 살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은 내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고 접근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반면, 일본 학교에서는 '주변의 공기(분위기, 주위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기조)를 읽으라'라고 가르쳤다. 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오키나와 편에 패널로 출연했을 당시 나리카와 아야.그는 방송 출연 계기에 대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오키나와 사람들의 슬픈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tvN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오키나와' 편에 일본인 패널로 참석했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다소 민감하고 불편할 수 있는 주제였는데, 방송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
"나는 일본과 오키나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일본을 옹호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패널로 출연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이번 책에서도 다뤘지만, 겉으로는 일본이 '하나의 나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어느 오키나와 출신 교수님이 "류큐국(현 오키나와)은 아직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며 "한국이 부럽다"라고 했던 말씀이 크게 와닿았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오키나와의 희생을 지우려는 태도는 한국과의 역사 문제를 대하는 태도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 한국 사회는 한국인이 봐도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정치적으로도 늘 격동적이다. 외국인 입장에선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
"2002년 처음 유학을 왔을 때만 해도 한국의 다이내믹한 변화에 매료됐다. 일본에선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활기와 에너지가 신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변화가 때때로 너무 빠르게 느껴진다. 한일 관계 변화가 내 생활에도 영향을 크게 미치더라(웃음). 앞으로는 일상에 좀 더 밀접한 정치와 안정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 얼마 전 출간한 <지극히 사적인 일본>에서 일본 사회의 색다른 면, 숨겨진 것들을 솔직하게 다뤘더라. 일본 내에서도 쉽게 언급하기 어려운 주제인데, 쓰게 된 계기는.
"이 책은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자기 나라를 소개하는 시리즈'의 일본 편이다. 처음에는 여행책인 줄 알았다(웃음). 그런데, 정치와 역사 같은 민감한 주제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서는 '내가 역사전문가가 아닌데 잘 쓸 수 있을까?' 싶어서 망설였다. 이후 출판사에서 나의 관점에서 집필해도 괜찮다고 조언해 집필하게 됐다. 일본에서는 한일 간 민감한 문제를 다루기 어렵고 거부당하는 일이 많다. 그럴 때일수록 나는 터부(Taboo)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일본인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한일 갈등 속에서 '눈치 없이' 쓰기로 한 이유"
- 한국에서는 반일, 일본에서는 혐한 감정이 양국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책을 통해 이런 불필요한 오해와 감정을 풀고자 노력한 듯한데, 일본 사회의 반응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사실 많이 부담스러웠다. SNS에서 비난을 받으면 나보다 가족과 친구들이 더 걱정하고 상처를 받았다. 나보고 '괜찮냐?'며 안부도 묻는다. 물론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에서 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 개봉 기사를 썼을 때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비난하는 이들의 목적은 내 입을 막는 데 있다. 그럴수록, 나는 '눈치 없이' 계속 쓰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인가, 내용 중에 <일본 사회의 속살> 파트와<천황의 나라> 파트가 있더라. 일본인의 관점에서 조금 민감할 수 있는 부분인데.
"사실 일본에서 출간했다면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어로 쓰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천황에 관한 내용은 일본에서 매우 민감하다. 개인적으로는 1945년 패전 후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물었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 일본인에게 천황이 어떤 존재인지 한국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워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 그렇다면, 본인이 쓴 일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서길 바라는지.
"꼭 (일본을) 비판하려고 쓰지는 않았다. 일본인 스스로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다양한 시각과 생각이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한국 국회의원 조찬회에서 강연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은 왜 한국을 그렇게 싫어하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분이 말하는 일본은 정치인, 특히 자민당 아닐까. 나는 그간 문화계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젊은 세대가 한국 문화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민당이 평화헌법 개정을 시도하지만, 헌법 9조(평화주의를 규정하는 일명 '평화헌법')를 지키고 전쟁을 막으려는 국민도 절대 적지 않다는 사실을 한국인들도 알아줬음 좋겠다. 또 한국 사람이 흔히 일본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선입견이나 오해를 푸는 기회로 삼아주면 더 바랄 게 없다."

▲지난 5월 7일 서울 신촌 '책방무사'에서 가수 요조를 인터뷰하는 나리카와 아야(왼쪽). '책방무사'는 요조가 운영하는 책방이다. ⓒ 나리카와 아야
-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일본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문제' 파트다. 부당한 대우에 대한 침묵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하는 사회를 고발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부분 조용히 참고 산다. 하지만 한국의 미투 운동과 한국 문학의 일본 번역이 일본 여성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일본에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다만, 한국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며 여성 관련 작품을 여럿 알렸다. 이것이 일본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용기를 얻는 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다음 책은 아직 생각하지 않았지만, 글쓰기도 계속할 계획이다."
- 끝으로, 이 책이 한국 사회나 정치에 어떤 대화의 시작이 되기를 바라나?
"나는 이 책이 (한일 간) 솔직한 대화의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 단순한 공감을 넘어 반대 의견도 포함한 토론이 자유롭게 이뤄지길 원한다.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에게도 응원을 부탁드리고 싶다.(웃음)"
일본에는 올해로 10년째를 맞은 '책거리'라는 한국 책방이 있다. 일본에 있을 당시 그가 자주 찾았던 한국 문화 공간이었다고. 나리카와 아야는 이와 반대 버전인 일본 책방을 한국에서 열기 위해 분주하다. 그곳에서 책과 영화를 매개로 한일 교류의 장을 넓혀가겠다는 큰 꿈을 키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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