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을 연재하는 까닭은 자연과 인간, 삶과 사유를 잇는 다리로서 글을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며 만나는 풍경과 들꽃, 그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인문학적 질문과 깨달음을 붓글씨와 함께 풀어내며, 독자와 함께 마음의 결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시 한 편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킬 때가 있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가 떨리는 듯한 감흥, 저절로 숨이 멎듯 감탄이 터지는 순간-그럴 때 시는 영혼을 흔든다. 사춘기 시절, 조지훈 시인의 '사모'를 읽고 난생처음 영혼마저 뒤흔들리는 강렬한 경험을 했다. 그 시는 단번에 마음을 파고들었고, 외운 구절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무의식처럼 입가에 맴돈다.
피 끓던 시절에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시가 감성을 적셨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숱하게 겪는 동안 이성 간 사랑에 대한 감수성은 시나브로 무디어졌다. 그런 내 마음에 불을 지핀 여인을 만난 건, 불혹을 지나고 몇 해를 더 보낸 때였다. 잊고 지냈던 감정의 심지가 다시 타오를 만큼 강렬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옥봉, 나를 흔든 시는 '몽혼'(夢魂)이었다.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요즈음 임께서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달빛이 사창에 어리면 첩은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만약 꿈길에도 발자취가 남는다면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임의 집 앞 돌길의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외다.

▲몽혼(夢魂)사창에 달빛이 어리면, 첩은 더욱 애닯습니다. 몽혼임을 향한 꿈길의 흔적을 붓으로 새기다. ⓒ 이명수
이토록 사무치는 그리움이라니! 이옥봉의 '몽혼'은 마치 벼락처럼 내 영혼을 깊이 뒤흔들었다. 조지훈의 '사모'를 달달 외웠던 사춘기 때의 열정이 솟아나, 옥봉의 시를 백 번쯤 외우고 오십 번쯤 종이에 썼던 것 같다.
40대 중반, 옥봉의 비극적 사랑과 시적 재능에 매료되어 단숨에 이 글의 초고를 썼다. 20여 년이 흘러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 다시 꺼내 본 글에서도 그때의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녀의 삶이 주는 강렬함, 시가 가진 애절함에 깊이 공감하며 마치 그 시대를 살았던 것처럼 글을 써 내려갔던 것 같다.
그즈음 옥봉의 시에 흠뻑 빠져 있던 어느 날 밤, 꿈에 바닷가에서 소복을 입은 여인을 보았다. 멀리서도 그 여자가 옥봉임을 직감했고,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여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익숙한 얼굴. 놀랍게도 내 아내와 닮아 있었다.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몽중유(夢中遊)-꿈속에서 놀다.나는 무엇을 쓸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습관적으로 쓴다. 제부도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밀려왔다가 빠지는 파도와 장난치며 꿈결 같은 순간을 보냈다. 남도 잡가 ‘흥타령’의 구절처럼 삶은 모든 것이 꿈인지도 모른다. ⓒ 이명수
옥봉이 환생하여 내 아내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다가,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장난삼아 '옥봉 여사'라고 불렀다. 아내는 천재 여류시인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는 것에 내심 싫지 않은 듯했다. 물론, 환생한 옥봉 여사가 뛰어난 시재는 가지지 못하고 괴팍한 성질만 가지고 환생한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덧붙이기도 했다.
비극적인 사랑과 시인의 혼
이옥봉의 생애는 한 편의 비극시와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 이봉은 전주 이씨 왕족으로, 선조 때 옥천군수를 지낸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관기 출신이었고, 당시의 신분 질서에서 옥봉의 앞날은 관기로 살거나 첩이 되는 것이 운명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글을 가르쳤다. 열일곱에 양반가에 시집보내 안온한 삶을 기원했지만, 운명은 또다시 그녀를 저버렸다. 남편은 결혼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시댁도 기울었다. 옥봉은 친정으로 돌아왔고, 이후 한양에서 시인 묵객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조원이란 선비를 만나 마음을 빼앗겼다. 정3품인 승지 벼슬을 지낸 조원은 율곡 이이와 함께 진사시에 장원할 정도로 수재였고, 외모 또한 출중했다고 전해진다. 옥봉은 그를 사무치게 사랑했지만, 조원의 반응은 냉랭했다. 첩이 되겠다고 자청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인연을 잇고자 아버지 이봉이 나섰다. 인맥을 총동원한 끝에, 조원은 '더는 시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그녀를 첩으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는 세간의 화제가 되는 옥봉의 시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당파싸움으로 시 한 구절이 빌미가 되어 화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문자옥(文字獄)의 시대였으니 말이다.

▲몽중서(夢中棲)꿈속에 깃들어 산다. 가슴 저미는 그리움이 詩로 피어나 천년이 흐르는 혼이 되다. ⓒ 이명수
사랑을 위해 시 쓰는 재능을 가슴에 묻은 옥봉은 10년이 넘도록 시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는데,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 목사에게 편지 한 장을 써 주면 풀려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아낙을 불쌍히 여긴 옥봉은 남편 대신 '위인송원(爲人訟寃)'이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洗面盆爲鏡 (세면분위경)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 (소두수작유) 물을 기름 삼아 머리를 빗네
妾身非織女 (첩신비직녀)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닌데
郞豈是牽牛 (낭기시견우) 낭군이 어찌 견우이리오
이 사건이 벌어진 날은 칠월칠석이었다. 칠월칠석에 이 시를 지어, 견우가 아닌 자신이 어찌 소를 끌고 가겠냐는 재치 있는 비유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시에 담긴 재치에 탄복한 파주 목사는 산지기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조원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크게 꾸짖고 내쳤다. 옥봉은 눈물로 용서를 빌었지만, 조원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소박을 당한 옥봉은 한양 뚝섬 근처에 방 한 칸을 얻어 지내며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은 냉정하고 야박한 성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40대에는 그런 냉혈한을 그토록 오매불망 사랑했던 옥봉의 심리 상태가 궁금하기도 했다. 어쩌면 조원은 내가 알지 못하는 대단한 매력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솔직히 알 수 없는 그 매력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 나는 조원이라는 인물보다 사랑의 아픔에 더 집중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데이트 폭력이 심심찮게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상식처럼 회자한다. 심리학 책에서,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것은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성모 마리아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여자들은 자신의 사랑으로 남자의 거친 면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는다는 내용인데,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지금 생각하니 조원의 차가운 본성을 조금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옥봉의 집착도, 이제는 어렴풋이 이해된다. 내 주변에도 그런 여인이 있었다. 차가운 사랑에 묶여 평생 마음고생했던 여인. 그녀의 삶을 생각해 보니 옥봉의 절절함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옥봉의 시는 애절하기 그지없다. 꿈속에서도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을 가슴 절절하게 풀어놓았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임진왜란 전쟁 통에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후일담은 더욱 기이하다.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한 원로 대신이 다가와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이었다.
약 40년 전, 중국 해안가에 소복 입은 여인의 시신이 떠내려왔다. 그 몰골이 너무나 흉측하여 아무도 감히 건지려 하지 않았고, 시신은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를 떠다녔다고 한다. 담력이 센 사람을 시켜 그 시신을 건져내니 놀랍게도 온몸에 시가 적힌 한지를 친친 감고 있었다고 한다.
그 시가 너무도 절창이라, 해동 조선국 이옥봉이라 적힌 이름을 따라 시신을 정중히 묻고, 시는 책으로 엮었다고 했다. 그녀가 정말 그렇게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그녀의 사랑과 시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웅변하듯 보여 준다.
아픈 사랑, 그리고 삶의 본질

▲샤스타데이지와 우미인화(꽃양귀비)낮곁에 산책하다가 본 샤스타데이지와 우미인화(꽃양귀비). 샤스타데이지는 구절초와 많이 닮았지만 봄에 꽃이 피고, 구절초는 가을에 핍니다. 관화미심(觀花美心)-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 내란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 공동체 모두가 상처를 받았고,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꽃도 보고 시도 읽으면서 마음을 차분히 정화할 시간입니다. ⓒ 이명수
자신이 쓴 시를 온몸에 감고 바다에 뛰어든 옥봉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떠올랐다. 목숨을 걸 만큼 사랑한 두 영혼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겹쳐 보였다. 한 여인을 향한 사랑으로 생을 던진 베르테르처럼, 옥봉 또한 그렇게 사랑했으리라.
40대에는 그저 '아픈 사랑'에 마음 아파했다면,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은 그 아픔의 의미를 되묻는다. 오래전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김광석의 노래에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프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로 이 노랫말을 이해하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정답이 있을 수 없지만, 옥봉의 삶과 시는 진정한 사랑이 깊은 기쁨과 환희뿐 아니라 때로는 상상할 수 없는 아픔까지 동반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이는 비단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삶은 삶이 아니다'라고 했다. 옥봉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랑의 아픔, 그리고 그 사랑이 좌절되었을 때 찾아온 죽음을 통해 삶의 가장 깊은 본질을 마주했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시는 단순한 비극적 사랑을 넘어, 아픔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인간의 보편적인 고뇌를 오늘날 우리에게도 묻는다.
시는 시간을 건너 마음을 꿰뚫는다. 이옥봉의 시처럼, 어떤 시는 당신의 가장 깊은 그리움과 마주하게 만든다. 이옥봉의 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묻는다. 당신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삶을 더 깊이 통과한 적이 있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