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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롱 시민기자는 지난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던 현장에 있었습니다. 참사의 생존자인 그는, 지난 2022년 11월 2일 한 포털사이트 커뮤니티에 참사 이후 자신이 받은 상담 기록을 일기와 대화 형태로 정리해 올린 후 <오마이뉴스>에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이야기' 연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이태원 참사 '그 이후'의 삶에 함께 귀기울여 주세요.

 겨우 하루하루에 기대어 발을 내디뎠던 그때는, 내겐 겨울을 넘어 빙하기였다.
겨우 하루하루에 기대어 발을 내디뎠던 그때는, 내겐 겨울을 넘어 빙하기였다. ⓒ darabosralph on Unsplash

오랫동안 내게는 계절이 겨울 하나였다. 시릴듯한 추위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주 휘청거렸고,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와 견디지 못하게 외로웠으며 너무 깜깜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마음의 계절이었다. 겨우 하루하루에 기대어 발을 내디뎠던 그때는, 내겐 겨울을 넘어 빙하기였다.

내 눈앞에 거대한 얼음 산이 녹을 기미도 보이지 않을 것처럼 웅장하게 서있던 그때, 나는 줄곧 경상도로 북토크를 다니고 있었다.

30여 년 전부터 뿌리 깊게 내려 앉은 지역감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여전히 사회적 참사를 정치화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당시의 나는 두려움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꿋꿋이 여러 지역으로 북토크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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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등 떠밀지도 않은 오롯이 내가 한 선택. 무서워도 일단 가보겠다는 의지는 어디서 왔을까. 그런데 다녀오고 보니 이유를 알았다. 오늘의 이야기는 2024년 1월 19일 대구행 북토크, '나른한 책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문을 열자 기대와 다르게, 많은 독자들이 모여 계셨다. 놀라움 반, 기쁨 반. 조금은 편하게 할 수 있겠다 생각하던 그 순간, 독자층의 연령대가 딱 반반 나뉘어 있다는 특징을 발견했다. 2030세대와 4050세대의 반반 조화. 젊은 층으로만 쏠려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대구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전과 달리 지역 감정에 따라 정치를 판단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판단하는 현상이 많이 없어졌고 오히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의 정치적 토론이나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생각을 깨려는 시도와, 그 시도에 의해 얼마든지 설득 당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전에는 설득조차 하지 말라는 철옹성 같았다면, 이제는 상식의 기준에 대해 대화하고, 생각을 열고자 하는 상호세대의 발전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야기였다. 감히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을 거라 웃으며 말하는 대구 독자들은, 그래서 자신들은 오히려 더 치열하게 대화한다고 내게 전했다.

사회적 참사에 대해서도 북토크를 통해 더 깊게 접하고, 생각을 바꿀 것이 있다면 바꾸고 돌아가서 책을 추천하며 더 열심히 주변과 대화하리라는 마음으로 왔다는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변하고 있구나 느꼈다. 아주 느릴지언정, 변화는 오랜 기간 동안 씨앗이 심어지고, 싹을 틔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내가 느낀 대구는 가장 진보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었다. 무엇이든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이는 잠재력 있는 도시, 그 안에서 치열하게 변화하고 있는 도시.

그들과 함께 나눈 주제는 역시,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부터 거슬러 올라갔다. 4050세대를 중심으로 대구 지하철 참사를 직접 겪은 분들과, 현장에 있었던 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구 지하철 역사 내에 여전히 참사를 기리는 곳이 있어 매번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일상적으로 참사를 기리며 함께 하고 있는 것 같다는 2030세대의 말에 해답이 있는 것 같았다.

참사를 직접 겪은 사람은 온 마음과 몸으로 처절한 심경과 아픔을 기억하고, 후 세대는 기록으로 그것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는 것. 이런 자세가 지금 우리 사회 전체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내가 원하는 바도 그랬고, 유가족이 원하는 방향도 그것이 맞을 거라 확신한다.

그렇다면, '왜 현 세대의 참사에 대해서는 이전 참사처럼 포용하고 기리는 자세가 없을까요' 내가 역으로 물었더니 그들이 답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세상이 혼란스럽게 하니까요.'

가짜뉴스의 출현, 혐오정치, 극단으로 치닫는 가치 싸움 등 사람들이 옳은 판단과 결정을 내리게 그냥 두지 않는 세상이라는 말에 이마를 탁 쳤다.

그렇다면 해법이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을 다 감싸 안고, 포용력이 넓은 너그러운 시대를 다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흐름이 북토크 내내 만들어졌다.

그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었던 당시였던 터라, 투표에 대한 이야기도 역시나 뜨거웠다. 투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묻는 질문이 들어왔다. 나는 '어떤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는가, 다시 말해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을 잘 뽑아주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가 겪은 이태원 참사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어떤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아야 하는가.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식은 무엇인가, 주류 정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다. 상식은 사람마다 기준이 너무나도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상식이 타인에게도 상식일 리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상은 그랬다. 그렇다면 사회 전체가 상식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정의 내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명확한 대안이나 기준을 갖지 못했다. 늘 무엇이 정답일지 고민만 하던 나는, 마침내 대구에서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양극단을 넓고 깊게 포용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주류 정치가 되어 결국에는 중도층이 넓어지고 그것이 구심점이 되어 더욱 좌우 극단을 끌어들이는 형태, 또는 그런 사람이 상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보도 보수도 둘 다 유능하고, 쓸모 있으며 우리 모두에게 발전이 가능한 방향 제시를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무엇이든 극단적인 좌우는 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를 대구에서 한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고 얼떨떨하네요'라고 전했더니 한 독자가 내게 말을 말했다 .

"아니요, 이미 변화는 오래전부터 천천히 있었을 걸요. 최근 투표 현황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민주화 된 이후부터 30여 년을 보면 분명히 변했어요. 지역 감정의 틀을 깨고 선거가 이루어지는 일들이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명히 있어요. 그게 변화의 키 포인트예요. 다음 대선이 그래서 기다려져요."

그 독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우리 사회는 늘 발전하고 진화했다. 시행착오를 거쳤을 뿐, 큰 차이로 휘청거리지 않았다. '다음 대선에서는 좀 더 다른 대한민국을 기대할 수 있겠지'라고 기대했었는데 그때의 빙하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녹아 장미가 짙게 피는 계절에 또 한번 빠르게 대선을 치르게 됐다.

사전 투표 첫날, 역대 최고 투표율을 갱신하는 중이다. 언제든 나아갈 힘과 변화할 힘이 우리에겐 있다. 어떤 대한민국이 우리를 기다릴 것인가.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앉아야 하는가. 투표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전투표#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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