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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5월 27일 대전광역시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퇴임 후 첫 공개 강연을 하고 있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5월 27일 대전광역시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퇴임 후 첫 공개 강연을 하고 있다. ⓒ 박소희

[문형배 특강①] "탄핵 기각론은 성립 불가, 관용과 자제 말하고 싶었다"(https://omn.kr/2dtqy)에서 이어집니다.

27일 대전광역시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정책대학원. 헌법재판관 시절 사형제도 위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점이 아쉽다는 문형배 전 재판관에게 한 학생이 이렇게 요청했다. "다음 정부에서 연임해주세요!" 문 전 재판관의 답변은 단호했다. "재판관 연임은 안 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을 했습니다."

연임 요청은 바로 거부했지만, 퇴임 후 첫 공개 강연인 만큼 문 전 재판관은 쏟아지는 질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최근 불거진 개헌론, 의대 증원 등에 관한 의견도 스스럼없이 밝혔다. 오랜 은인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 등 지나온 삶 역시 진솔하게 털어놨다.

[개헌] "대통령 임기?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대통령 중임제를 하면 나라가 발전하고, 5년 단임하면 안 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 전 재판관은 헌법을 '상식'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헌법을 고친다면, 그 또한 '사람'을 중심에 둬야 한다고 했다. 문 전 재판관은 "개헌의 방향이 권력구조 개선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기본권 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된다"며 "'기본권 보장을 확대하는 데 권력구조 개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질문을 이렇게 던져야 된다"고 말했다. 그는 헌법에 주거보장에 관한 권리를 넣은 나라들도 있다고 소개하며 "그런 문제들로 관심사를 확대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문형배 "비상계엄 속보에 해외토픽인 줄, 당연히 잠 못자" 박소희

문 전 재판관은 또 "헌법재판소하고 대법원의 관계를 조금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대법관은 국회의 동의를 받는데 재판관은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는 사람이 제법 있다(헌재 소장, 국회 선출 재판관 3인만 본회의 표결 – 기자 주)"며 "그게 과연 옳은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만든 법을 위헌으로 날리는 데 국회의 동의조차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걸 감당한다? 저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대법원장의 재판관 3명 지명권을 두고도 "그런 나라가 없다. 유례없는 제도"라고 지적했다.

[지역법관] "서울 콤플렉스 없어... 변방은 창조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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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전 재판관은 헌법재판관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줄곧 부산·경남에서만 근무한 '비주류' 법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2019년 인사검증 동의 요청을 받았을 때 "3초도 기다리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며 "건방진 얘기지만, '재판관을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산·경남에서만 근무했지만 한 번도 서울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지역법관도 헌법재판관을 능히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도 털어놨다.

문 전 재판관은 '변화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뤄진다'는 고 신영복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다. 콤플렉스가 없어야 된다"는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제가 비록 서울대학을 나왔지만, 서울대학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에 있는 판사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한 판사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없애야 자존감, 자부심도 있고 창의적인 것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 그리고 김장하 선생] "사회는 모든 사람의 기여로 굴러가"

'어른 김장하와 문형배' 이른바 '김장하 장학생'으로 알려진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퇴임 이후인 5월 2일 경남 진주를 찾아 김장하(81) 선생을 만났다.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던 문 전 대행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김장하 선생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그런 그에게 김 선생은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으라"라고 말했고, 문 전 대행은 "이 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어른 김장하와 문형배'이른바 '김장하 장학생'으로 알려진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퇴임 이후인 5월 2일 경남 진주를 찾아 김장하(81) 선생을 만났다.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던 문 전 대행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김장하 선생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그런 그에게 김 선생은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으라"라고 말했고, 문 전 대행은 "이 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 김보성

서울과 서울이 아닌 곳, 엘리트와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사람들로 끝없이 갈라지는 한국 사회를 문 전 재판관은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사회가 통합이 되어야 하지 않나. 그 통합이 되는 첫 번째는 나에게 인정되는 원칙이 저 사람에게도 인정되어야 한다"라며 "야당 시절에 내가 주장했던 걸 여당 시절에 밀어붙여야 한다. 예를 들면 방송 3법을 민주당이 주장했는데, 그들이 여당이 되면 통과시키면 된다. 그러면 사회가 통합된다"고 짚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설득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될듯 말듯 될듯 말듯, 그걸 건너야 된다. 그걸 넘어서면 한꺼번에 다 풀린다. 우리 사회는 그런 점에서 조급하다. 더욱이 의대 증원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 그런 큰 문제를 던질 때 그 정도 생각을 갖고, 그 정도 설득해서 밀어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좀 더 설득하고 인내했더라면 아마 지금 벌어지는 것보다 훨씬 결과가 좋았을 것이라고 본다. 하다못해 500명이라도 우선 증원하자. 그리고 추이를 보고 선택지가 이렇게 많은데 '무조건 2000명, 지금 당장', 그 결과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안 되지 않았나.

화학과에서 공부 중이라는 학생은 "엘리트 집단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 폐해가 지난 넉 달 동안 많이 드러난 것 같다"며 그 해법을 질문하기도 했다. 문 전 재판관은 "그런 고민을 제도화할 수 없으니 결국 개인이 풀어야 하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소통과 성찰"이라며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저한테 좀 정직했던 게 아닌가(싶다)"고 답변했다. 그는 학창시절 '불법 시위'를, 군 제대 후 '인권변호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그 마음을 새겨뒀던 일기를 보관 중이라고 했다.

제가 청문회 때 (했던) 김장하 선생의 정신을 한 번도 잊은 적 없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분이 저에게 공부할 기회를 줬고, 만약 그때 공부할 기회를 못 줬다면 제가 다른 길로 갔을 수 있다. 그런 데에 대한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래서 어떤 일에 부닥칠 때 '그분의 은혜를 갚는 길인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어려운 일이 없었다.

이 모든 마음은 '사회에 빚을 졌다'는 부채감에서 비롯됐다. 문 전 재판관은 대학 시절 운동권 친구와 자취했던 경험을 얘기하며 "저녁에 만나면 얘(친구)는 낮에 시위가 있고, 뭘 했고, 무용담을 한참 얘기하는데, 저는 아무 할 이야기가 없고. 그런 데에서 오는 부채감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 또 "중학교 때 교복을 물려받아서 입고, 교과서는 친척, 참고서는 친구에게 빌려서 공부했다"며 "제가 이 자리 오는 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기여가 있었는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다 마찬가지 아닌가. 이 사회가 굴러가는 데에 모든 사람의 기여가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그걸 정말 정직하게 자신한테 물어본다면 과연 이 사회에서 오만한 자가 있을 수 있나. 권력을 쥐든 쥐지 않았든 어떻게 자기 혼자서 이 삶을 지탱할 수 있나. 우리 사회가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 자신의 과거에 대한 정직, 솔직함, 이런 것들을 갖고 있으면 저는 그렇게 타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표현할 수 없다 생각한다.

문 전 재판관은 또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가 후진국"이라며 우리법 연구회 이야기도 꺼냈다. 그는 "우리법 연구회가 2004년인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제발표를 했는데 2018년 헌재가 결정했다"며 "이게 '빨갱이 단체'가 아니라 이 사회를 떠받치는 하나의 견해"라고 했다. 이어 "제가 우리법 연구회를 했기 때문에 헌법재판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우리 사회가 생각이 다른 데에 대한 관용을 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자연은 순수를 혐오하지 않나. 단일한 종이 있으면 환경이 바뀌었을 때 다 죽고, 여러 종이 있을 때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이렇게 인류가 진화한 것 아닌가. 왜 인간사회는 순수를 요구하나. 어떻게 똑같은 생각을 하고, 어떻게 똑같은 빨간 옷만 입나. 때로는 파란색 옷도 입어야지. 나를 빨갱이라고 말한 분들한테 묻고 싶다. 내가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기여한 것 아닌가? 대한민국을 지키는 사람이 어떻게 빨갱이가 될 수 있겠나? 그렇게 질문하고 싶다.

[과학] "과학과 정치, 무관할 수 없어..." R&D 예산 삭감 언급

대통령에 항의하다 입 틀어막힌 KAIST 졸업생 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윤석열 대통령이 축사를 할 때 R&D 예산과 관련해 자리에서 일어나 대통령을 향해 항의하던 중 제지를 당하고 있다. 2024.2.16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대통령에 항의하다 입 틀어막힌 KAIST 졸업생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윤석열 대통령이 축사를 할 때 R&D 예산과 관련해 자리에서 일어나 대통령을 향해 항의하던 중 제지를 당하고 있다. 2024.2.16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연합뉴스

문 전 재판관은 과학자들을 향한 애정 어린 조언도 남겼다. 그는 "과학자는 '과학기술은 중립이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건 없다. 과학기술이 어느 용도로 쓰이는가에 대한 통제 역시 과학자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고 봤다. 또 "법률가는 과거의 것을 회고하는 사람이고, 과학자는 미래의 것을 만들어 나가고 시스템적으로 사고한다"며 "저는 과학자가 정치의 영역에서 좀 더 비중이 높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카이스트는 2024년 2월 졸업식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R&D 예산 삭감을 항의했던 신민기씨가 '입틀막'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문 전 재판관은 이 일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의대 정원 2000명을 가지고 저 난리를 치는데, R&D 예산 30% 삭감을 두고 그 정도 난리를 쳤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여러분이 왜 나라를 스톱 못 시키나. 과학자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가 유지된다는 걸 보여줬다면 감히 30% 예산을 줄일 수 있었겠나 싶다"라며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형배#헌법재판소#김장하#개헌#카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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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 (sost) 내방

오마이뉴스 사회부 법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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