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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청년연합(1983-1992)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맞서 공개적인 정치투쟁을 벌였다.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 민담에 두꺼비는 뱀에게 대항했다가 잡아먹히지만 뱀의 뱃속에서 두꺼비 알이 부화해 뱀을 죽이고 그 자양분으로 수백 수천의 새끼 두꺼비들이 탄생하게 한다. 민청련 활동 중에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에 많은 민청련 두꺼비들이 세상을 떠났다. 윤석열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광장의 젊은이들은 아마도 그들 두꺼비들의 후손이 아닐까. 민청련 두꺼비들이 살아냈던, 때로는 애틋하고 때로는 안타까운 삶의 흔적들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일간지 사회면에 학생시위를 주도한 서울대 상대 학생 세 명을 퇴학시켰다는 기사가 떴다. 1967년 9월 17일자 <조선일보>였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 검열이 있었을 텐데도 용케 굵은 고딕 글자에 5단이나 지면을 할애한 눈에 띄는 기사였다.

16일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은 지난 10일 일부 상대생들이 벌인 6.8부정선거 규탄 데모의 책임을 물어 동교 학생회장 서성석(21, 경영학과 3년), 김근태(21, 경제학과 3년), 함한식군(20, 무역학과 2년) 등 3명을 제적 처분했다…… 서울상대 학생 약 150명은 지난 10일 오후 2시쯤 교정에서 부정선거 성토대회를 연 다음,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밖 1백여m까지 나갔다가, 기동경찰대의 저지로 해산됐었다. - 1967년 9월 17일 <조선일보>

 1967년 9월10일 6.8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김근태 등이 퇴학 처분을 받았음을 알리는 신문 보도. (조선일보 1967.9.17)
1967년 9월10일 6.8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김근태 등이 퇴학 처분을 받았음을 알리는 신문 보도. (조선일보 1967.9.17) ⓒ 조선일보

'6.8부정선거'란 1967년 6월 8일에 실시한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가리킨다. 131명의 지역구 의원과 44명의 전국구 의원(비례대표)을 선출하는 선거였는데, 부정과 관권 개입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개표 결과 공화당이 130석, 신민당이 43석, 대중당이 1석이었다. 집권 여당인 공화당이 제1당일 뿐만 아니라 개헌선인 117석을 13석이나 초과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야당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서, 사상 유례없는 공개 투표와 관권 탄압에 의한 강도적 부정선거가 자행됐다고 규탄하고, "부정선거가 감행된 지구에 대한 선거 무효화 조처를 취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손가락으로 인주를 그어 빨간 반점 표시가 있는 '빈대표', 지장을 두 개 찍은 것 같은 '피아노표', 붓뚜껑이 같은 난에 두 개가 찍힌 '쌍가락지표' 등이 적발됐다.

첫 학생운동의 대가는 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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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6.8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터져 나왔다. 6월 12일 첫 시위가 발발한 이래, 연일 가두시위가 계속됐다. 시위 3일째 되던 6월 14일에는 서울시내 9개 대학과 일부 고교에까지 번졌다. 박정희 정권은 휴업령으로 대응했다. 문교부 장관은 소수의 학생이라도 데모를 하는 대학은 휴업 조처할 것이라는 정부 방침을 천명했다. 시위 5일째인 6월 16일 전국 67개 대학 가운데 30개교와 고등학교 148개교가 휴업에 들어갔다.

서울대에서는 2학기 개강에 맞춰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다시 일으키기로 했다. 누군가 나서야 했다. 9월 10일 서울상대 시위는 휴업령 탓에 가라앉은 시위 열기를 재연하기 위해서 2학기 개강이 이뤄진 직후에 처음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시위는 두 국면으로 전개됐다. 오후 2시 교내 강당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회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는 7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어서 가두 시위를 감행했다. 다행히 교문을 뚫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200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 100m 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화들짝 놀랐다. 휴업령으로 눌러놓은 학생 시위가 다시 불붙을지도 모르는 통치 위기가 초래된 때문이었다. 박 정권은 주동자로 간주되는 세 명의 학생을 추려내서 퇴학 처분을 내렸다. 20~21살의 대학생들에게는 가혹한 조치였다. 한두 학기 학업을 중단케 하는 정학 처분이 아니라 학생 신분 자체를 박탈하는 조치였다. 사람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서울대 상대 학적이 박탈되고, 미래는 암담하게 됐다. 이와 같이 막다른 곳에 갇힌 세 명의 상대생 속에 경제학과 3학년생 김근태가 포함되어 있었다.

김근태 의식의 대전환

3년 전만 하더라도 학생운동 참여를 거절하던 김근태가 아닌가.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근태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뒷날 구술사 진술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대학교 들어와서 내가 놀랐던 것은, 일제 치하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일본 제국주의 체제에... 부역을 했던 사람들이 모든 영역에서 박정희까지 포함해서 부역자들이 지도자층 됐다는 사실을 굉장히 분노했어요. 정치, 사회, 교육, 대학교까지 그런 상황에서 한일국교정상화라는 거는 과거의 청산이 없이 하기 때문에 종속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것에 눈뜨면서 굉장히 당황했어요.'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고 한다. 고교 3학년 때 지녔던 관점은 구체적인 현실 맥락이 없이, 상상의 공간에서 형성됐던 것이었다.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지 20년이나 지났으므로 구 식민모국과 구 식민지였던 두 국가가 국교를 맺어도 괜찮다고 봤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는 식민지였지만, 현재는 엄연한 주권국가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한 이후 김근태는 사안을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제 식민지 통치에 협력했던 부역자층이 해방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도자층의 지위를 장악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 청산은 없었다. 과거의 부정적인 유산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김근태는 알게 됐다. 굉장한 분노와 함께 커다란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형식논리의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적 맥락에 연관하여 대상을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인식의 전환을 경험했다. 이러한 전환은 소년기를 벗어나 청년기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한 지표였다.
대학에 진학한 그해 1965년에도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그는 조금씩 학생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소극적인 참여자에 불과했다. 망설이다가 참여했다고 한다. 그를 학생운동으로 이끈 동기는 공동체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 데에 있었다. 그를 행동에 나서게 한 동인은 도덕적인 결단이었다.

그해 6월 12일부터 22일 사이에 서울법대 계단강의실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촉구하는 단식 농성이 있었다. 이 현장에서 김근태는 법대에 진학한 고교 동기 조영래를 만났다. 서로 친한 사이이면서도 불과 1년 전에는 한일협정 반대시위 참가 여부 문제로 반대편에 서지 않았던가. 조영래는 김근태를 보더니 무척 놀라고 또 좋아했다고 한다.

김근태를 학생운동으로 이끈 또 하나의 매개체가 있다. 써클 활동이었다. 당시 써클은 교과과정 외부에서 학생들의 학문 탐구를 지원하는 '학회'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합법적인 위상의 공개 단체였다. 서울상대에서는 경우회(經友會)가 유명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비판경제학을 공부한다는 취지로 활동했다. 써클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경제학과 학생들이 중심이 된 학회였다. 상대생이면 누구나 다 입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발 시험을 거쳤다. 한 학년에서 10명씩만 입회시켰다. 김근태는 1학년 때부터 이 학회에 가입했다. 동료들 중에는 김태동(나중에 청와대 경제수석), 노성태(<중앙일보> 주필), 김수행(서울대 교수) 등이 있었다.

경우회는 학구적인 성격이 짙은 모임이었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교육과정이 부실하다고 생각하여 대안적인 커리큘럼을 모색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교실에서 다루지 않는 영문서적을 돌려보면서 독해했다. 또 일본어 서적을 읽을 목적으로 강독용 일본어 문법을 함께 배우기도 했다.

1학기 말 즈음에는 또 다른 써클 경제복지회에도 참여했다. 이 써클은 우리 사회가 지금 이대로는 곤란하지 않는가라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CCC(한국대학생선교회)라는 기독교 선교단체 산하에 만들어진 학회였다. 기독교 학생들 또는 친기독교 성향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박정희 군사독재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박세일(서울법대 교수), 강철규(공정거래위원장), 김국주(제주은행장), 이창식(YMCA 사회운동) 등이 참여했고,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 박성준(성공회대 교수)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서울대 상대 교내 축제기간 중, 잔디밭에 앉은 잘 차려입은 남녀 축제 참가자들에게 간식거리를 판매하고 있는 김근태. '점수 딸 기회랑께'라고 쓴 팻말이 유머러스하다.
서울대 상대 교내 축제기간 중, 잔디밭에 앉은 잘 차려입은 남녀 축제 참가자들에게 간식거리를 판매하고 있는 김근태. '점수 딸 기회랑께'라고 쓴 팻말이 유머러스하다.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는 경우회 활동에 주력했고, 경제복지회에는 다소 소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그 외에 비공개 써클에는 참여한 것 같지 않다. 그는 뒷날 회고하면서 "비공개 조직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학생운동에 관한 한 그 당시 좀 더 선진적이던 서울대 문리대와는 사정이 달랐던 것 같다.

써클 활동은 그의 인식과 실천을 여물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학생운동 참가의 폭과 깊이가 점점 확장됐다. 그리하여 3학년이 되는 1967년에는 학생자치기구의 간부직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그즈음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공식 논의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학생자치기구의 집행부를 장악할 필요성에 합의했다. 하지만 학생운동 참여자들이 아직 학생 사회의 주류가 아니었다. 학생회장 직을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판단했고, 그 대신에 의결기구인 대의원회에 진출하여 발언권을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 결과 김근태는 1967년 봄에 서울상대 대의원회 의장에 취임했다. 당시 서울상대 한 학년 숫자는 190명이었다. 1~4학년 전부 합쳐야 700명 남짓이었다. 학생 시위를 조직할 때 대열을 이룰 수 있는 숫자는 50명에서 150명 선이었다. 그해 9월 10일에 있었던 서울상대의 6.8부정선거 규탄대회와 가두시위는 바로 이러한 조건 위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날개죽지 잘린 어린 새

김근태의 제적은 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박정희 정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으니, 시위에 따른 학사 징계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두 학기 정학이 아닐까. 그것도 견디기 어렵겠지만 각오해야 했다. 그런데 제적이었다. 학생 신분 자체를 말소하는 조치였다. 가혹한 보복 조치였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제적 처분을 받은 지 거의 한 달이나 지났을까, 난데없이 징집영장이 떨어졌다. 입영 날짜가 닷새밖에 남지 않은 영장이었다. 가족들은 두 번 연거푸 충격을 받았다. 김근태 본인도 충격을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조치였다. 자기에게 내려진 부당하고 석연찮은 조치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마음을 다잡지 못 했다.

형 김국태가 나섰다. 아홉 살 연상의 형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 문학 월간지 현대문학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소설가였다. 아우를 설득했다. 군 복무란 언제든 간에 한 번은 치러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된 마당에 눈 딱 감고 징집에 응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고 권했다. 형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작정을 하고 나니, 아우는 마음이 조금은 평정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허탈감을 감추지는 못 했다.

훈련소에 입대하러 가는 날, 형은 아우와 동행하여 기차를 탔다. 소주를 샀다. 형제는 술잔을 기울이며 밤늦게까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하지만 새벽 일찍 훈련소에 집결해야만 했다. 눈을 좀 부쳐야 했다. 아우가 먼저 잠을 청했다. 뒷날 형은 그때 풍경을 소설 <물 머금은 별>에 담았다.

'아우는 끙, 하면서 몸을 옹동그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차간 공기는 으스스해졌다. 형은 웃저고리를 벗어서 등때기로부터 가슴 쪽으로 걸쳐 덮씌워주었다. 잠든 아우의 얼굴을 이윽히 내려다보려니까 코밑이며 턱언저리에 손 집게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자란 몇 가닥의 까만 터럭이 눈에 띄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징표였다. 그러나 아직은 털이 보풀보풀한 어린 새였다. 그 작고 어린 새는 서투른 날개짓을 파닥여보다가 그만 죽지 끝을 잘리우고 만 것이었다. 죽지의 상처가 아물어 다시 날개짓을 하게 되려면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었다. 형은 또다시 울음이 복받치는 것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두 눈을 싸쥐고 흑흑 느껴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났더니 후련해졌고, 우렁우렁 취해오던 술기운도 가라앉는 듯했다. 형은 찬찬히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턱언저리를 쓸어주었다.' - 소설 <물 머금은 별>

형이 보기에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코밑과 턱 언저리에 몇 가닥의 까만 터럭이 보풀보풀 자라고 있었지만 작고 어린 새였다. 날아오르려고 파닥거리던 날개짓이 좌절된 셈이었다. 날개죽지의 상처가 아물어 다시 날개짓을 하려면, 얼마나 기약 없는 시간을 견뎌내야 할까. 형은 잠든 아우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다가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고, 눈동자에는 물방울이 차올랐다.

 김국태의 소설 물 머금은 별을 게재한 현대문학 187호, 1970년 7월호 표지.
김국태의 소설 물 머금은 별을 게재한 현대문학 187호, 1970년 7월호 표지. ⓒ 현대문학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임경석은 역사학자입니다.


#민청련#김근태#68부정선거#2025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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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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