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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5월 26일 오전 11시 2분]

2022년 8월, 광주에서 자립을 준비하던 보육원 출신 청년 2명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중 한 명은 "자립이 두렵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짧은 한마디에는 오랜 시간 시설에 머물던 청년이 세상에 홀로 던져졌을 때 마주한 막막함과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보건복지부는 탈시설화 정책과 자립지원 확대를 통해 보호 종료 청년들을 위한 기반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실은 여전히 거기까지 닿지 못하고 있다. 광주의 비극이 던진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탈시설화는 청년들에게, 그리고 여전히 시설에서 자라는 수천 명의 아이들에게 '집'을 의미할 수 있을까?

"받으며 자란 아이들, 주체가 되기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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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한 보육원에서 3년째 일하고 있는 사회복지사 이아무개씨는 아이들의 현실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 그는 "시설 밖 세상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아이들이 많아요. 방황하는 경우도 있죠"라고 말한다.

"여기선 선생님들이 대부분의 일을 대신해줘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주체가 되는 경험을 거의 못 해요. 최근 들어 자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립체험관, 자립교육 등의 프로그램이 제공되고는 있으며 아이들마다 특성과 자립에 대한 인식, 준비 등이 달라 개별 특성을 고려한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 중에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엔 부족하지 않게 선물과 프로그램이 제공되지만, 마음의 허전함을 100% 채우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자립수당은 생계비로 부족... 때로는 가족이 대신 써요"

정부는 보호종료 아동, 즉 자립준비청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자립정착금과 자립수당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최대 1500만 원의 정착금이 일시금으로 지급된다. 월 자립수당도 기존 40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인상되었다. 하지만 현장의 체감은 다르다.

"자립수당은 주거비, 식비, 교통비 등 기본적인 지출을 하고 나면 거의 남는 게 없어요. 어떤 아이들은 그 돈을 가족에게 빼앗기기도 해요. 생계를 돕는다는 명목이지만, 결국 본인 이름으로 들어온 돈을 스스로 쓰지 못하는 거죠."

보건복지부는 2023년 '자립지원 실태조사'에서 삶의 만족도, 자살생각 경험률, 대학 진학률, 취업률, 평균 소득 등 주요 지표가 2020년 대비 개선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수치적 개선이 자립준비청년 개개인의 삶의 질을 실제로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는다.

"자립준비청년을 담당하는 전담 인력도 2023년 180명에서 2024년 230명으로 늘었지만, 이 숫자는 여전히 부족해요. 전국 평균으로는 1인당 약 43명의 청년을 담당하지만, 지역에 따라 격차가 크고 일부 지역에서는 한 명의 담당자가 90명 이상의 청년을 맡는 사례도 있어 심층적인 상담이나 장기적인 멘토링에는 분명한 한계가 따르죠. 말 그대로 '지원을 위한 지원'이 되기 쉽습니다."

"탈시설화, 현장에선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탈시설화 정책은 지난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에도 포함돼 있다. 대규모 양육시설 중심에서 벗어나 위탁가정, 그룹홈, 공적 입양 등 다양한 보호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 방향이다. 그러나 정작 보육원 현장에서 일하는 이아무개씨는 그 변화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회의에서는 종종 탈시설화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데 저도 그렇고 동료 교사들도 '이제 우리가 설 자리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커요. 실제로 입소 아동도 줄고 있어요."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1년 신규 보호대상아동은 3437명으로, 2020년 대비 683명 감소했다. 같은 해 가정보호 비율은 36.5%로 전년보다 2.7%p 증가했다. 이는 탈시설 기조와 아동 인구 감소가 동시에 영향을 미친 결과다.

"위탁가정도 완벽하진 않아요"

가정형 보호의 대표적 모델인 위탁가정과 그룹홈은 늘고 있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진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각자 사연이 있는 아이들을 책임지려면 전문가로서의 역량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예산도 부족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할 여건이 안되거나 아이들의 특성과 필요에 맞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할 때가 많죠."

해외 사례에서도 위탁가정의 그늘은 드러난다. 2007년 영국 글로스터셔에 거주하던 위탁모 이니스 스프라이는 19년에 걸쳐 세 명의 위탁 및 입양 아동에게 극심한 학대를 가했다. 이 사건은 위탁가정의 사전 검증과 관리 체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탈시설화가 진짜 '집'이 되려면"

이아무개씨는 탈시설화가 성공하려면 단순한 '공간 이동'에 그쳐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지속적인 지원이 정말 중요해요. 시설에서 벗어나 다른 형태로 보호된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생활기술 교육, 또래 관계 맺기, 심리 상담이 함께 가야 해요. 보호자들도 전문가로서 교육을 받아야 하고요."

보육원이 없는 사회를 상상해 본 적 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네, 상상해 봤어요. 그런 사회에선 아마 위탁가정, 그룹홈, 자립주택이 중심이 되겠죠. 그 환경에서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거예요. 아이들을 돕는 사람은 언제나 필요하니까요."

아이 곁에 머물러 줄 어른 한 명

탈시설화는 제도나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그 곁에 누가 있는가의 문제다. 아무리 정책이 정교해도, 그 사이에서 아이를 지켜주는 단 한 사람의 어른이 없다면 모든 시스템은 무용지물이다.

아이들은 여전히 어른을 필요로 한다. 다그치지 않으면서도 지켜주고, 상처주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어른 말이다.

보육원이 사라진 세상에서, 탈시설화가 진짜 '집'을 향한 길이 되려면, 그 곁에 오래 머물러 줄 어른 한 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탈시설화#자립준비청년#보육원#아동복지#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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