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 몇몇 이름이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판사 누구, 검사 누구. 그들의 행실과 일탈이 주는 피로감을 감당하는 일이 사뭇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내 삶과 전혀 무관한 자들인데, 어느 순간 그 이름이 내 일상에 기생하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가전제품의 덜거덕거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듯, 파편으로 달라붙어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중하고 있었다. 그건 명백히 내가 겪어야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피로감은, 법의 부재가 아니라, 법의 과잉과 왜곡된 집행 때문일 것이다.
근대의 법은 원래 국가권력으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었던가. 오늘날 그 법의 질서가 오히려 시민의 삶을 침해하고, 감정을 소진하는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 혹시, 법을 권력의 정당화 도구로 여겨도 무방하다는 낡은 사고방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잘 작동하는 법과 행정은, 시민의 일상에 가능한 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침묵과 평온 속에서 기능하는 질서, 그것이 공공성의 바람직한 형식이다.

▲justice ⓒ Gerd Altmann (pb.)
정치가 아플 때, 시민은 느낀다
우리가 신체 일부를 의식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몸이 아플 때다. 통증이 신체의 감각을 살아 오르게 한다. 평소에는 달고 있는 줄도 몰랐던 기관이, 그 기능이 훼손될 때만 존재감을 드러낸다. 정부와 법원, 검찰과 정당, 그리고 의회 또한 그런 '사회적 기관'이다.
시민이 그것들의 존재를 선명히 의식하는 순간, 대부분 어딘가 고장이 났다는 신호다. 시민이 정치와 사법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 않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동양 철학에서, 정치의 이상은 눈에 띄지 않는 작동, 즉 무위(無爲)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최상의 정치는, 백성이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太上,不知有之)." -노자-
고대 중국 하(夏), 은(商), 주(周) 체제는, 군주나 정부가 앞에 나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질서가 유지된 이상적 사회로 회자한다. 이상적 사회는, 강제나 감시 없이도 구성원 각자가 자율적 윤리와 책임 의식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상태다. 이는 억압적 통치 없이도 자유와 안정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인간의 존엄과 정치의 존재 이유가 살아있는 세련된 형태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반대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수사, 기소, 판결 하나하나에 따라 공동체 구성원의 삶이 요동친다. 이는 단순히 고위공직자의 일탈을 넘어, 시민 개개인이 정치적 해석을 강요받고, 전문적인 법조 언어를 이해해야만 하는 불행한 사태로 이어지고 있다. '시민의 정치화'는 민주주의의 필수요소라 말하지만, 과연 그것이 이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정치가 모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침범해서는 안 된다.

▲figure-of-justice ⓒ pixabay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정치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급한 인간에게 지배 당하는 것이다." -플라톤 <국가>
정치적 참여를 독려하는 구호처럼 인용되는 저 구절을, 반어적으로 질문해 보자. 시민이 정치를 '외면한' 탓일까. 오히려 정치를 '외면하지 못한' 탓은 아닐까. 말하자면 과도한 정보, 언론의 정치화, 일상의 침범과 같이 지나치게 정치에 노출된 시민의 삶이 문제가 아닐까 하는 되물음인 것이다. 정치가 우리의 삶을 잠식할수록, 오히려 우리는 더 깊은 탈정치적 영역을 갈망하게 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방식으로만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자들, 바로 그들이 정치의 저급화를 주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득세는 시민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의 구조 자체가 그들을 필연적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열한 정치논쟁과 반복되는 법정 다툼은 의회의 직군조차 단조롭게 만들었다. 생업과 계층의 목소리가 빠져나가고, 전문 정치인 중심의 폐쇄적 회로가 자리 잡았다. 우리의 정치 환경은 이미 오래전에 인간적 상상력을 상실했다. 정치는 공공의 숙의 기술이 아니라, 정치인의 생존 기술로 축소되었다.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시민이 관료보다 열위에 놓여 고착된 결과, 구조적으로 정치의 품격이 하강하고 있다.
정치가 저급해질수록, 시민은 자기 삶을 정치 바깥에 보존하려 한다.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삶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정신적 생존 기술이다. 무관심은 도피가 아니라, 정치를 과잉으로부터 되돌리기 위한 잠정적 저항이다. 건강한 공동체는 구성원이 정치를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이며, 공론장을 점거한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여백이 허용된 사회일 것이다.
문제는, 이제 무관심조차 허용되지 않는 시대의 압박이다. 정치가 사적 영역까지 파고들고, 법이 일상의 언어가 되는 순간, 시민은 극도의 피로를 겪는다. 진영 간의 갈등이 되풀이되자, 급기야 종교마저 신의 이름을 내걸고 거리로 나와 극단의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정치 언어는 인격을 파괴하고, 사법 언어는 감정을 마비시킨다. 건강한 사회란, 정치적 참여에 앞서 정치로부터 안전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은 평온한 일상이 가능한 지적 공간이며, 일상의 온존은 시민권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다.
정치는 무대가 아니라 장치다
정부는 평소 배경 음악처럼 조용히 존재하되, 위기의 순간에만 정확히 작동하는 매끄러운 장치여야 한다. 시민은 평온한 일상을 누릴 권리가 있다. 판결문을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예산안을 읽지 않아도 되는 자유, 기소장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언론의 사명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 그런 자유가 진짜 자유민주주의 아닐까.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단 하나, 합리성이다. 합리성은 사회적 신뢰의 깊이를 가늠하는 기준이며, 불필요한 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효율적인 장치다. 만일 그들이 법과 행정을 온전하게 집행한다면, 설령 통제와 감시가 존재하더라도, 시민은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는 장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열차 여행 중에 기관사, 승무원, 정비사의 이름이나 그들의 과거를 굳이 검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차권을 끊는 순간, 우리는 안전한 운행을 보장 받을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국민이 정부 관료, 법조인, 정치인들의 이름과 행실을 주시하며 사는 것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고단한 일상인가. 그것은 이 사회가 아직도 합리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규범의 문제이거나, 사람의 문제이거나, 혹은 둘 다 무너졌을 가능성이다.
그것은 구성원 개인의 삶이 정치적으로 침해 당하고 있다는 징후다. 법과 정치는 전면에 등장해서는 안 되는 기계적 장치다. 구성원의 안전과 일상을 온전하게 지키는 일이 법과 정치의 본질이다. 조직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사람이 공복(公僕)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극 연출자가 무대에 올라 관객을 꾸짖고, 정비공이 열차 안을 돌아다니며 승객을 위협하는 작태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 비정상적인 사태의 반복으로, 지난 반년 동안 우리가 겪은 시간의 질감은 지나치게 무겁고 아팠다. 정치와 행정은 사회 가동을 위한 배경 장치여야 한다. 고장 나지 않은 기계처럼, 통증 없는 육신처럼,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정확하게 작동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국민은 큰 흐름에만 참여하고, 정부는 그 세부를 조용히 책임지는 체제. 이 단순하고 정당한 바람이 과연 지나친 요구란 말인가. '그건 내 일이 아니다.'라는 무심한 감각 속에 깃든 단단한 자유야말로, 시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가장 확실한 권리다. 6월 3일 출범할 새 정부는, 이 조용한 권리의 목소리를 아프게 들을 수 있을까.
요란한 언행이 아닌, 평온을 유지하는 기술,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질서로 국가를 운용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뢰의 구조다. 그 신뢰를 가능하게 할 마지막 카드는, 시민의 선택에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