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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을 연재하는 까닭은 자연과 인간, 삶과 사유를 잇는 다리로서 글을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며 만나는 풍경과 들꽃, 그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인문학적 질문과 깨달음을 붓글씨와 함께 풀어내며, 독자와 함께 마음의 결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 안의 봄을 지키는 방법에 대하여

촉촉한 새벽 공기가 가슴 깊이 스며든다. 하루의 시작은 어김없이 이른 걸음으로 열린다. 이태 전, 문득 거울 앞에 선 내 얼굴에서 시간의 흔적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둔해진 몸놀림과 팽팽하던 허리둘레가 어느새 부드럽게 늘어난, 시간의 낙인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그날의 거울은 풍경이 아니라 경고장이었다. 굳은살처럼 자리 잡은 습관이 내 허리에 문장을 새겼다. 그날 이후,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공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내 안의 계절을 다시 일으키는 조용한 의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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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50분. 알람 소리에 눈을 뜨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오늘만 쉬자'는 유혹이 속삭이듯 다가오지만, 처음 마음먹었던 결심을 떠올리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몸을 데운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천천히 공원으로 향한다. 운동 기구 앞을 지날 때면 이제는 반가운 얼굴들이 먼저 손을 들어 준다. 빠르게 걷고 굳었던 근육을 풀다 보면 아침의 뿌연 감각이 맑게 거둬지고, 가벼운 숨결만이 남는다.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젠 배도 조금 들어간 듯하고, 체중도 2kg쯤 줄었다. 새벽 운동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지만, 아직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방심은 늘 작은 틈으로 찾아드는 법이기에, 지금은 '루틴'의 단계일 뿐이다. 영어를 굳이 끌어들이자면, '루틴(routine)'은 마음이 이끄는 반복이고, '해빗(habit)'은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다. 몸이 먼저 기억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는, 마음이 매일 등을 힘껏 떠밀어야 한다.

이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 되뇌는 나만의 주문은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무병최리, 지족최부(無病最利, 知足最富)." 병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이익이고, 만족을 아는 것이 가장 큰 부다. 말 그대로다. 병이 들면 그날부터는 돈 들어갈 일뿐이다. 건강을 잃은 부자는 결국 가난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병이 들지 않도록 미리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삶의 진짜 이익이다.

나는 달릴 때마다 이 구절을 입속으로 반복한다. 마치 구령처럼 박자에 맞춰 외우다 보면, 숨이 가쁜 순간에도 누군가가 나를 응원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단순한 한 문장이 내 발걸음을 하루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팝나무 꽃 이팝나무는 하얀 쌀밥처럼 풍성하게 피어나는 꽃 때문에 ‘쌀밥나무’라 불리며, ‘이팝’은 함경도 사투리로 쌀밥을 뜻한다. 라틴어 학명 Chionanthus retusus는 ‘하얀 눈꽃’을 의미하며,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이팝나무 꽃이팝나무는 하얀 쌀밥처럼 풍성하게 피어나는 꽃 때문에 ‘쌀밥나무’라 불리며, ‘이팝’은 함경도 사투리로 쌀밥을 뜻한다. 라틴어 학명 Chionanthus retusus는 ‘하얀 눈꽃’을 의미하며,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 이명수
이팝나무 꽃 떨어지다. 이팝나무 꽃잎이 떨어진 거리. 파주출판도시의 이팝나무 꽃잎은 지금 지고 있다. 가장 아름다울 때 지는 것, 그것이 자연의 품격이다.
이팝나무 꽃 떨어지다.이팝나무 꽃잎이 떨어진 거리. 파주출판도시의 이팝나무 꽃잎은 지금 지고 있다. 가장 아름다울 때 지는 것, 그것이 자연의 품격이다. ⓒ 이명수

밤새 비가 내린 다음 날,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이팝나무 꽃잎이 젖은 땅 위에 흩어져 있다. 하얗게 쏟아진 풍경 앞에 서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이 가슴을 적신다. 그 순간 오래된 가곡 한 자락이 마음을 스쳤다.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어린 시절부터 어딘가 모르게 이 곡의 가락이 마음에 들었다. 흩어진 꽃잎을 바라보면 자동적으로 시 구절이 뇌리를 스친다.

조지훈 시인은 "꽃잎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라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덧없음과 체념의 미학을, 이형기 시인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며 깊은 여운을 노래했다. 꽃이 지는 순간, 그 안에 깃든 무상함과 순환의 질서를 꿰뚫어 본 시인의 눈길은 지금도 유효하다. 세월은 흐르고 봄은 지나가지만,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겉모습의 젊음이 아니라 내면에 머무는 계절이다.

덜 바라고, 더 감사하는 날들

떨어진 철쭉 절정의 시간을 남기고 바닥에 내려앉은 철쭉꽃. 스러짐조차 찬란했던 봄날의 마지막 숨결이다.
떨어진 철쭉절정의 시간을 남기고 바닥에 내려앉은 철쭉꽃. 스러짐조차 찬란했던 봄날의 마지막 숨결이다. ⓒ 이명수

며칠 전, 점심 산책길에 철쭉이 우수수 떨어진 모습을 보았다. 바닥에 이리저리 흩뿌려진 꽃잎은 시들었어도 강렬했고, 그만큼 애틋했다. 절정의 봄조차 스러져가는 이치를 마주하며, 삶의 유한함을 다시금 실감했다. 하지만 꽃잎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땅에 스며들어 생명의 거름이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시들어도, 그 시간은 다음 생명을 위한 거름이 된다.

어느 봄날, 공원에서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부부를 보았다. 남루한 운동복 차림에 서로의 보폭을 천천히 맞추던 그들은, 가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조용히 오가는 눈빛 속엔 오랜 세월이 만들어 낸 신뢰와 애틋함이 배어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은 꾸밈없이 단정했고, 서로를 의지하는 모습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걷는다는 건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함께 견디고 감싸안는 일일지도 모른다.

최근 '행복을 전하는 행복한가'라는 단체에서 보내온 메일을 종종 읽는다. 감각적인 이미지와 함께 짧은 글을 실어 보내오는데, 대개는 훑어보고 지우지만, "나는 이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제목의 메일은 눈에 머물렀다. '피아노 치는 할머니', '잘 웃는 할머니', '할아범과 사이좋은 할머니'까지와 같은 소박하지만 따뜻한 바람들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래서 문득 '나는 어떤 파파(皤皤) 할아버지가 되고 싶은가'를 생각해 보았다.

1. 그림 그리는 할아버지
2. 잘 웃는 할아버지
3. 기타를 연주하는 할아버지
4. 콧노래 흥얼거리며 여행하는 할아버지
5. 할멈과 정다운 할아버지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번진다. 늙어서도 가슴에 사랑이 흐르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떠오른 중요한 가치들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그 목록은 앞으로도 덧붙여질 것이다. 아마 이런 상상은,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나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삶은 나이 들수록 무거워지지만, 동시에 가벼워져야 한다. 덜 소유하고, 더 나누며. 덜 주장하고, 더 경청하며. 덜 바라고, 더 감사하는 삶. 그 길 위에서 비로소 사람은 존재의 본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소유보다 존재로 피어나는 봄

2024년, KBS 연기대상에서 90세 이순재 배우가 대상을 받았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그의 소감은 단출했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단상 위 모습은 '화락춘잉재(花落春仍在) 꽃은 떨어져도 봄은 여전히 있다'는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청나라 말기 유월의 오언시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삶의 한 계절이 지나도 내면의 봄은 지지 않는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단단한 품격과 빛나는 정신은 나이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 주었다. 이순재의 봄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출판 편집자로 40년을 살아오며 많은 저자를 만났다. 그중 경희대학교 P 교수님이 떠오른다. 그는 정년퇴직 후 이발 봉사를 시작했다. 얼굴을 단정히 다듬는 일이 마음까지 맑게 만든다는 믿음으로, 그는 이발 기술을 직접 배웠다. "머리 다 하고 나니 인물이 훤하시네요." 그의 한 마디에 환하게 웃는 어르신들의 얼굴에서, 그는 존재의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P 교수님의 모습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프롬은 "존재하는 삶은 주는 삶이다"라고 말한다. P 교수님은 더 이상 소유물이나 직함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대신, 이발 봉사를 통해 시간과 재능을 나누며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었다. 봉사는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높이는 일이다. 받은 이는 웃음으로 보답하고, 주는 이는 그 웃음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되찾는다. 세상은 그런 조용한 손길들 덕분에 여전히 따뜻하다.

2025년 4월 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했다. 2014년, 그가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디며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췄던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세월호 유가족의 발을 정성껏 씻어 주던 손길은 말보다 더 큰 위로였다. 단 14만 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그는 '소유보다 존재'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 어른이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 꼭 한두 문장을 가슴에 새겨 둔다. 그것이 책 한 권이 내게 남긴 진짜 값이라 믿는다. <소유냐 존재냐>에서 가장 깊이 새겨진 문장은 이렇다. "현대인은 가진 것에 집착할수록 존재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양적 성장만을 좇는 사회의 허망함을 정곡으로 찌른다.

노년의 삶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화려함도 풍요도 아닌, 비워낼수록 짙어지는 내면의 충만함. 그리고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 피어나는 조용한 기쁨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안의 봄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쓰고 있다. 꽃은 떨어졌지만, 봄은 여전히 내 곁에 있다.

화락춘잉재(花落春仍在) 꽃은 져도 봄은 머문다. 떨어진 꽃잎은 흩어졌지만, 봄의 숨결은 여전히 마음속에 머문다.
화락춘잉재(花落春仍在)꽃은 져도 봄은 머문다. 떨어진 꽃잎은 흩어졌지만, 봄의 숨결은 여전히 마음속에 머문다. ⓒ 이명수

덧붙이는 글 | 게재가 된다면, 이팝나무 꽃 사진과 이팝나무 꽃이 진 사진을 같은 자리에 편집해 주기를 바랍니다.


#인문학적붓장난#꽃은떨어져도봄은그대로있다#존재의가치#내면의봄#존재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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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4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철학하는 바보』『깨달음을 얻은 바보』『동방우화』『불교우화』『한국인과 에로스』『중국인과 에로스』 등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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