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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3 15:16최종 업데이트 25.05.23 15:16

"거부할 수 없는 매력" 맨부커상이 뒤늦게 알아본 소설

[서평]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

그녀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살던 집보다 족히 서너 배는 됨직한 거대한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올라 등에서 힘차게 물을 뿜어올렸다. 주변에 있던 어부들도 물고기를 보고 놀라 탄성을 질렀다. 금복은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생명체의 출현에 압도되어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물고기는 거대한 꼬리로 철썩 바닷물을 한 번 내리치고는 물 속으로 사라졌다.(p.49-50)

2004년에 출간되어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면서 화제를 모았던 천명관의 <고래>는 2023년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The International Booker Prize) 최종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다시 주목 받았다.

맨부커 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의 콩쿠르 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명성이 높은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2016년 맨부커 상을 수상하면서 이 상의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졌으니, <고래>의 최종 후보 소식은 수많은 독자를 다시 설레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신밧드의 모험>(1975)이라는 TV 만화가 있었다. 열대 야자나무가 있던 섬은 다름 아닌 대왕고래의 등이었고, 고래가 물 속으로 자맥질하는 순간부터 모험은 출발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내내 그 장면이 떠올랐다. 우리가 현실이라 믿으며 살아가는 세계는 언제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갈지 모르는 위험천만 일이 벌어지는 곳이다. 우리는 그것은 운명이라 부른다.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는 닦아내는 일

천명관의 장편소설 <고래> 2004년 재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면 주목받았던 이 소설은 2023년 맨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면서 다시 조명받았다.
천명관의 장편소설 <고래>2004년 재10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면 주목받았던 이 소설은 2023년 맨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면서 다시 조명받았다. ⓒ 한준명

이 소설은 '노파-금복-춘희'로 이어지는 세 여성의 삶의 질곡을 다룬다. 천하에 없는 추물인 노파는 복수의 화신으로 주인공들을 파멸시키는 악귀(惡鬼)이자 파멸과 죽음의 사신(死神)이다. 금복은 지금 이 순간의 감정과 생각을 중시하는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신념과 의리가 있고 욕망을 위해 육체과 정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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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p.301)에 온몸을 내던지며 '전통적인 세계를 소멸시키는 모더니티의 상징'(p.447)이며, 근대문명과 자본주의의 폭압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금복의 딸인 춘희는 백킬로그램이 넘는 큰 덩치에 통뼈로, 언어 장애가 있고 백치이다. 순수하고 영적이지만, 자기 방어를 위해서는 순간 폭력적인 야수로 돌변해서 부수고 물어 뜯는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질긴 생명을 이어가며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 일컫을 만큼 평생 벽돌 만드는 일에 몰두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 소설의 성공은 등장인물의 다양성에서도 기인한다. 그들은 기이한 모습이거나 기이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다. 사생아, 거인, 죽을 때까지 생선 냄새를 풍겼던 생선장수, 주막집의 추한 노파, 거대한 양물을 가진 반푼이, 쌍둥이 자매, 벌을 몰고 다니는 애꾸눈 여인, 창녀, 포주, 죄수 간호사, 가학적인 교도소장, 약장수, 엿장수, 칼자국이 있는 건달 등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난 인물들이고, 그들은 예외 없이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운명은 그들에게 찾아온 행운과 행복을 여지 없이 철저하게 파괴한다. 칼자국이 죽음의 순간에 "도대체 왜…?"라는 마지막 말을 했던 것처럼 그들의 파멸에는 필연적 이유가 없다. 우리가 운명에 대해 "도대체 왜…?"라고 묻는 것처럼 그것은 영원히 해답을 준비해 주지 않는다.

이렇게 극악스럽기까지 한 이 소설의 주제를 애써 이해하려는 독자에게, 소설의 서두에서 춘희와 함께 감방에 있던 한 여죄수(청산가리)가 한 말은 소설을 읽는 내내 숙제처럼 남는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p.10)

근현대의 과정에서 무한 반복되었던 파멸과 죽음의 서사

지나친 열정은 불행과 재앙의 전조이다. 무한 성장의 근현대로 상징되는 금복의 삶은 그 결과가 만든 참담한 비극성과 연결된다. 근현대의 과정에서 인류가 저지른 끔찍한 살육의 기억은 '사람들은 단지 살아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p.129)고 할 만큼 필연적 광기의 결과물을 남겼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열정을 다해서 최선의 노력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라고 주문을 외듯 살아왔는데, 소설 속의 결과는 파멸과 재앙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중심인물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욕망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남은 자들은 다시 그들의 삶으로 돌아가 비루한 일상을 살아갈 것이고, 풍문으로만 그들의 삶을 확장하고, 윤색하고, 평가하고, 순간순간 잊어가면서 또 살아간다. 이것은 기억의 법칙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벽돌을 구우며 삼십 킬로그램의 무게로 춘희가 죽어가는 모습은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죽음의 하나와 다름없이 가볍게 여겨진다. 원시와 야생의 공간인 '평대(坪垈)'가 현대문명에 의해 풍요로워졌지만, 그것은 또 여지없이 잡초더미 속에 묻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한다.

그곳에서 존재했던 기괴하고 꺼림직한 이야기가 '사십팔 킬로그램의 가난한 도예과 여대생과 재벌 2세의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로맨스'(p.415)로 바꾼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진실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그 호들갑은 우리의 주인공 춘희의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졌다. 그녀는 영웅도 아니었고 희생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장인도 아니었으며 숭고한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우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어떤 삶을 원했는지 알 수 없다.(p.415)

그래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문학동네 소설상 심사평에서 소설가 은희경이 "이 작가는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작품에 빚진 게 별로 없는 듯하다"고 평한 것처럼, <고래>는 장르를 확정할 수 없는 소설이다. 맨부커상 심사위원회가 <고래>를 "이런 소설은 없었다"며 최종 후보로 추천하면서 "읽어보길 추천한다.에너지에 휩쓸린다. 캐릭터는 비현실적이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다. 착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소개한 것은 뒤늦은 감이 있다. 이 소설이 2020년에 번역가 김지영에 의해 세계 무대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이 이 뒤늦음을 거들 뿐이다.

<고래>는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역사소설이 아니다. 굵직한 사건과 소재에 따라 서사의 흐름을 이어가지만, 역사적 흐름에 의지하지 않고 '서사' 자체에 집중한다. 상상력에 무한정 의지하고 있지만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에 판타지소설도 아니다.

온갖 결함을 지난 인물이 등장하지만 희극이 아니며, 파국과 죽음의 종말은 연민과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지 않기에 비극이라 할 수도 없다. 삶의 무모함이나 무목적성은 '허무주의'로 귀결될 것 같지만, 등장인물들이 살아간 파란만장한 이야기, 욕망과 쾌락의 절정, 극단적인 육체적 고통을 경험한 이들의 삶은 무모할망정 무의미해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은 설화적 요소를 무한정 차용한다. 기이한 출생, 기괴하거나 빼어난 용모, 거인, 통뼈, 벼락출세, 예언, 살인, 방화, 금기와 위반, 저주, 자연재해, 괴력, 꿀벌의 출현 등 전기적 화소(傳奇的 話素)가 난무한다. 이야기는 서로의 이야기에 녹아들어가며 거대한 서사를 구성한다.

<고래>의 주요한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서술자에 있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판소리의 광대와 같이 이야기의 흐름에 무시로 개입하며 직접 독자와 대화한다. 그것은 문어적 서술이 아이라 구술적 달변에 가깝다. 모여 앉은 청중을 상대로 그들을 쥐락펴락하며 그들의 반응을 추임새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고 두리뭉수리 하게 언급만 해 놓아 궁금증을 자아낸 다음 어느 순간 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다시 꺼낸다든지, 소설 속에 에피소드처럼 등장했던 인물과 우연히 만나 다시 중심 서사를 엮어나가는 식이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사를 통해 단어와 문장을 중복하지 않고 풀어내는 입담은 거의 만담 수준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날카로운 풍자가 서려 있어서 무릎을 치게 한다. 마치 강릉단오제의 마지막 날에 벌어지는 별신굿에서 원통하게 죽은 원혼들을 차례로 불러내어 하소연과 눈물과 해학과 위로로 그들의 원한을 풀어내는 무속서사의 장면들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이 소설은 신화와 전설과 민담과 같은 설화적 요소들은 무한정 차용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단단한 직육면체의 세계에서 부드러운 원형의 세계로

이 소설의 중심 소재인 '벽돌'은 직육면체의 크고 단단한 것으로, 모이면 더 크고 단단해진다. 인류가 만든 문명을 가능하게 한 결정체이다. 인간의 욕망이 쌓아놓은 바벨탑이다. 춘희가 벽돌을 만드는 일은 맹목적이다.

그러나 그 벽돌로 쌓아올린 것들은 결국 무너지고, 파괴되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로 소멸시킨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과학주의를 맹신한 인류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대량 학살로 스스로를 파괴시키며, 그 고래등 같은 극장의 불구덩이 속에서 소멸해 간(소멸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재미있다. 한 번 책을 집어들면 마지막까지 책을 놓을 수 없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좀 허무하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와 같은 질문이 맴돈다. 삶의 본질과 가치, 사회와 인류와 세계의 문제와 같은 차원 높은 주제를 기대하는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서 직육면체의 단단한 '벽돌'의 세계는 부드러운 원형의 세계와 만나 화해한다. 이 불편하도록 기괴한 소설은 결말부에 이르러 독자의 생채기난 마음을 애써 위로하려는 듯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살아 있는 동안 상처는 치유될 것이고, 고통은 사라질 것이고, 분쟁은 화해로, 전쟁은 평화로, 비극적 결말은 행복한 결말로 맺어지길 기대하면서, 우리가 읽은 소설 속 주인공들은 또 다시 이 땅의 모든 질곡을 짊어지고 또 다른 이야기 너머로 사라질 운명인 것을.

그로 인해 내가 숨쉬고 사는 지금 여기가 그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다시 살아가야 할 곳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점보가 대기권을 벗어나자 둥근 지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구술처럼 보였다. 춘희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푸른 구슬을 바라보았다. 난 세상이 둥근지 미처 몰랐어. / 바보, 세상에 존재하는 건 모두가 둥글어. / 벽돌은 네모잖아. /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걸로 둥근 집을 지으면 결국은 둥근 거지. / 네모난 집을 지을 수도 있잖아. / 그래, 하지만 네모난 집이 모이면 둥근 마을이 되잖아.(중략) 여기는 아주 고요해.(p.420)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 [마음 닿는 곳에 있는 길]에도 실립니다.


#천명관#고래#제10회문학동네소설상#맨부커상후보#무속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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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명 (refriend) 내방

26년차 교사. 우리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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