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완의 〈줬으면 그만이지〉책겉그림 ⓒ 피플파워
누구나 기억에 스치는 선생님들이 있겠죠. 나도 그래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선생님이 떠올라요. 그중에 내 마음 속 깊이 각인된 스승이 몇 분 있는데 그중에 한 분을 꼽고 싶은 분이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 나의 담임 선생님이자 국어를 가르쳤던 지명종합고등학교 백남조 선생이 그분이에요.
그분은 거친 반항기를 품고 살던 그 시절에 참되고 올바른 사랑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어요. 학교를 출퇴근 할 때 그분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어쩌다 내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면 묻지도 않고 오토바이를 빌려주셨죠. 그렇다고 간섭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공부한다고 읍내에 나가 자취한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도 굶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가끔 맛있는 것도 사주었죠. 그분은 홀어머니 밑에서 커가던 나를 참되게 양육한 참 스승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한약방으로 돈도 많이 벌어 학교에 큰 도움이 되었을지 몰라도, 나중에 나이 들어 그럴 형편이 못 되면 괜히 사사로운 욕심이 생길까 두려웠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못난 사학 이사장이 되어 선생님들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려 들 거고, 그렇게 되면 처음 내가 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첫 마음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거죠."(203쪽)
김주완의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1982년 김장하의 나이 39살 때 온 재산을 털어 세운 명신고등학교였는데 1991년 48살에 국가에 기증한 이유가 그거라고 말한 거죠.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의 화폐가치계산기로 1991년의 재산가치를 환산하면 현재 280억 원이 된다고 하지만 미련 없이 떠난 거죠. 나이 들어 교육으로 사업을 하면 탈이 나기 때문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국가에 헌납했다는 거예요.
사실 '스승 김장하'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인 문형배를 통해 알게 됐어요. 문형배가 김장하의 장학생이었다고 해서죠. 그런데 이 책은 둘 사이의 더 깊고 올곧은 성품과 인간애를 엿보게 해요. 가난한 문형배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김장하를 만나 대학 4학년까지 장학금 받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인사차 갔을 때 김장하는 그리 말했다고 하죠.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 2011년 2월 문형배가 창원지법 진주지원장으로 부임해 인사차 식사대접하려 해도 김장하는 단칼에 거절했다고 하죠.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참 스승인 김장하의 취재기라 할 수 있죠. 김주완은 앞서 또 다른 어른 '채현국'을 소개한 바 있어요. 이번엔 왜 김장하였을까요? 김주완은 자동차 없이 버스와 대중교통과 택시로만 취재했는데 김장하도 그랬다는 거죠. 당시에 '남성당한약방'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고 젊은 나이에 학교 이사장까지 맡았으니 승용차를 탈 법한데 말이죠.
그 모습에 반해 김장하를 파고들었는데 교육을 넘어 언론과 문화와 역사와 노동과 시민사회 등 다방면에 아낌없이 베풀고 있었다고 해요. 다만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았고 선행은 하되 알려지길 꺼린 성품이었다죠. 그러니 더욱더 그를 세상에 소개하고 싶었던 거죠. 김장하의 제자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랐고 또 다른 김장하가 많이 나왔으면 하고 말에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우리말 '교양'은 헬라어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인데 훈련이나 체벌을 동반한 실제적인 행동을 말해요. 훈계는 '누데시아'(νουθεσία)로 말로 하는 교훈과 교정(矯正)을 의미하고요. '양육하다'는 '엑트레포'(ἐκτρέφω)는 '∼로부터'의 '에크'(ἐκ)와 '영양을 공급하다' '살찌게 하다'는 동사 '트레포'(τρέφω)의 합성어에요. 물리적인 공급을 넘어 인격적인 양육까지 포함한 뜻이죠. 그런데 자녀든 제자든 그 누군가를 양육하고자 한다면 부모나 스승이 실제로 그 삶을 살고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닐까요? 말과 혀로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이죠(요일3:18).
김장하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게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고 해요. 그런 억울함을 다른 이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한약업을 통해 번 돈으로 고등학교를 세웠고 수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대줬죠. 그렇게 하고서도 학교나 학생들에게 전혀 간섭하지 않는 고결한 성품이었죠.
책 표지에 그의 뒷모습이 담겨 있는데 평범한 어른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요. 하지만 줬으면 그만이고 내려 놨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참된 뒷모습이죠.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양육한 우리 시대 참 스승의 뒷모습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