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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같은 두 소녀는 1968년 베트남전쟁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서 가족을 잃고 전쟁고아가 됐다.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티탄은 한국인 남성을 보기만 해도 두렵고, 하미 마을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은 한쪽 귀의 청력을 잃는 전쟁 트라우마를 가졌다. 그렇지만 다가오는 6월, 진상규명을 위해 가해국인 한국에 방문한다.

퐁니 마을과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이 한국에 6일간(6월18일~23일) 머물며 국회에서 베트남전 진실 규명법 발의 기자회견과 국회 토론회, 다큐 <평화로 가는 길> 간담회에 참석한다.

방한 준비와 모금을 진행하고. 베트남전쟁 진상규명 운동을 하는 한베평화재단의 권현우 사무처장(활동명 '짜노')와 최정현진 평화교육 담당자(활동명 '아침')를 지난 19일 만났다.

 재단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권현우 사무처장(왼) 최정현진 평화교육 담당자(오)
재단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권현우 사무처장(왼) 최정현진 평화교육 담당자(오) ⓒ 한베평화재단

이번 초청은 시기적으로 의미가 크다. 퐁니·퐁넛 학살 사건 국가배상 소송이 2023년 2월 1심, 2025년 1월 2심에서 모두 승소하고 대법원판결만 남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판결을 기다릴 게 아니라, 먼저 책임을 인정하고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함을 알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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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는 2심에서 처음으로 한국 정부의 베트남전 관련 책임을 공식 인정했지만 진상규명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게 어려워요. 사회적 피로감을 뚫고 어떻게 국민적인 이슈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해요. 2023년에 1심 승소했을 때는 기자들 문의도 많이 오고 보도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올해 2심 승소 때는 이미 다뤘던 내용이라 데스크에서도 '이거 또 했던 거잖아'라는 반응이 많대요."(권현우)

한베평화재단은 민간인 피해자뿐만 아니라 참전 군인을 위한 시민운동도 진행한다. 권 사무처장은 참전 군인 전체가 다 민간인 학살에 연루된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32만 명의 참전 군인 중에 실제로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소수라, 대부분은 "난 그런 일 없었다"라고 말한다.

"자칫 피해자와 참전 군인의 대립 구도로 보일 수 있지만, 정부가 진상규명의 책임을 지지 않아 발생한 문제예요."

 평화기행(왼), 빈호아 마을 초등학교(오)
평화기행(왼), 빈호아 마을 초등학교(오) ⓒ 한베평화재단

한베평화재단 활동

권 사무처장은 2009년 베트남 꽝남성에서 진행 '한베 청년 평화 캠프'에 참여해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접한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최정 평화교육 담당자는 '전쟁 없는 세상' 등의 시민단체에서 평화 교육 운동을 20여 년간 진행하다, 2023년 재단에 합류했다.

재단은 25개 마을의 도합 50여 명 가량의 피해자 유가족에게 매년 편지를 쓰고 파스 등 선물을 보낸다. 최대한 여러 마을을 아울러 지원 활동을 하고자 한다. 정부 기관과도 채널을 만들어 소통한다.

"평화 기행 가서 마을 주민들이 누가 왔는지 내다보실 때, 위령제 때 꽃 보낸 단체라고 하면 알아보셔요.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게 가장 중요해요."(최정현진)

그중 민간인 학살 피해지역이며 한국군 증오비가 있는 빈호아 마을에는 학생 장학급 사업을 진행한다. 최대한 마을이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 결과다.

주민들은 처음엔 '미안한 나라에서 온 시민들이 주는 거네' 정도로 생각했지만, 코로나 때도 장학금을 계속 증정하며 진정성을 증명했다.

"피해자 중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한 슬픔이 있는 분이 많아서 후대가 장학금을 받고 학업을 이어가는 걸 좋게 보세요. 장학금을 받는 아이들 세대는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지금의 평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느끼길 바랍니다."(권현우)

한베평화재단 활동가는 4명인데, 그중 한 명이 평화교육 담당이다. 평화교육은 시민 인식 개선을 총칭하는 것으로 재단은 그만큼 청년층과 시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중요시한다.

베트남 학살 피해 마을에 직접 방문하는 '평화 기행'은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젊은 세대는 자유여행을 선호하고, 평화 기행의 비용이나 일정이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대신 재단과 함께 가면 피해자분들을 직접 만날 수 있어요. 베트남은 영어가 잘 통하는 곳도 아닌데 저희와 함께면 언어의 장벽이 없습니다."(최정현진)

생존자를 직접 만나고 위령비를 참배한 참가자들은 '마음속에 거대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26회차 평화 기행에 700명 정도가 다녀갔다. 영화감독, 작가, 교사 등 다양한 참가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민간인 학살을 알리는 씨앗이 됐다.

 2025년 1월 국가배상소송 항소심 승소 기자회견에서 기뻐하는 응우옌티탄
2025년 1월 국가배상소송 항소심 승소 기자회견에서 기뻐하는 응우옌티탄 ⓒ 한베평화재단
 시민평화법정과 하미 위령비에서 증언하고 있는 응우옌티탄
시민평화법정과 하미 위령비에서 증언하고 있는 응우옌티탄 ⓒ 한베평화재단

시민의 인식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실제로 피해자를 직접 만나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일이라는 걸 알면, 그 일이 내 일처럼 느껴져요. 한국 사회에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일깨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최정현진)

지금까진 연대해달라는 메시지가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법원 판결이라는 큰 당위성이 생긴 만큼 한국 사회 구성원이 이 문제를 나의 문제로 여기길 기대한다. 두 활동가는 더 나아가 시민들이 전쟁에 대한 메시지도 얻길 바란다.

"전쟁 피해는 반복돼요. 최근 가자지구에서도 학살이 일어났지만, 뉴스로 접해도 무감각해지기 쉽죠. 하지만 피해자가 직접 와서 증언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집니다. 베트남전 피해자 요구를 듣는 것 이상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전쟁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요."(최정현진)

현장에 가면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았냐?', '베트남 정부는 왜 사과를 안 받아주냐?' 등의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통령은 "불운한 일이었다.", "국민들이 빚을 졌다"는 말만 남겼다. 실제로 정부 차원에서 조사를 진행한 적은 없다.

"처음엔 사과 논쟁이 불가피했지만, 전쟁 끝난 지 50년, 학살 피해 이후로는 60년이 지난 현재는 진상조사 실시가 중요해요."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및 고엽제 피해 관련 포스터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및 고엽제 피해 관련 포스터 ⓒ 한베평화재단

오는 6월 3일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다. 한베평화재단은 새로운 정부에게 3가지의 정책과 법안을 요구했다.

"첫 번째는 국가배상 소송 1심과 2심에서 판결이 난 내용을 수용하라는 거예요. 재판을 중단하고 정부가 책임을 받아들이고 배상하라는 거죠.

두 번째는 공식 진상조사와 사과예요. 이 소송은 단 한 사람과 한 마을을 상대로 한 것이니,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사 기구를 만들어서 진상조사를 하고 배상까지 하길 바라요.

참전 군인의 인권 침해를 조사하고 배상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참전 군인들의 전후 PTSD나 정신적 후유증,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어요.

마지막은 기억의 문제예요. 용산 전쟁기념관 같은 공공기관 전시에 파병을 미화하거나 긍정적으로만 전시하는데, 앞으로는 한국군의 전쟁 범죄와 과오, 그리고 참전 군인이 전쟁 PTSD와 고엽제 피해까지 함께 전시해야 해요. 불편한 문제를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민간인 학살 기록은 시민단체가 조사한 게 전부라 정부의 공식 조사가 필요하다. 재단은 한국에 제주 4·3이나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등 과거사 조사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 있다고 강조했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거나, 배상까지 가면 부담이 크다는 얘기도 있는데, 대한민국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불편한 문제를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권현우)

#베트남전쟁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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