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수도권을 벗어나 몇 년을 지내던 동네는 밭농사를 많이 했다. 작은 땅도 그냥 두는 법이 없는 어르신들이지만, 밭에 어떤 작물도 심지 않고 그냥 두거나 비닐로 멀칭을 해두기도 했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던 나는 비닐로 덮어둔 땅에는 뭔가를 심어둔 줄 알았으나 그건 아니었다. 짜투리 땅이라도, 마당 안 작은 땅에도 먹을거리를 심던 분들인데 땅을 '놀게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해야 땅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작물을 심을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당장의 수확물을 포기하고 장기적으로 그 땅을 죽이지 않고 같이 가기 위한 방법이었다. 많이 수확해서 수익을 많이 남기면 된다는 생각이라면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장기적인 계획이다. 지금,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이 그런 심정으로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동의하고 있다.
김용균노동자의 죽음에서 시작된 모두의 투쟁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 노동자의 사망사고를 계기로 발전소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쳐도 죽어도 아파도 말하면 안되는 존재처럼, 일터의 손님처럼 취급당했던 노동자들이었다. 눈에 보이는 위험을 개선해달라고 요청해도 비용이 들어가서 안된다는 답만 받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위험성조차 알 수가 없었다.
청년비정규직 김용균노동자의 죽음에 대응하며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알게 됐다. 발전소 안에서는 어떤 보호장구도 없이 유리규석, 발암물질을 몸 안으로 흡입하고 있었고, 발전소 밖에서는 초등학교에 비소가 쌓이고 주변 주민들은 암에 걸리고 있었음을.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만의 편의와 이익을 생각했다면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고 사업장 내부 환경을 개선하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공기관에서조차 비정규직 중심의 고용구조를 가져가는 것이 어떻게 모두의 안전과 건강에 문제가 되는지 제기했다. 층층으로 이어지는 하도급 방식이 사회적으로 도움이 안되는 이유를 드러냈다. 노동자-시민들은 김용균노동자의 죽음으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같이 싸웠고 2019년 2월 정부의 약속을 합의서로 남겼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은 다 지켜지지 않았고 발전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약속이행을 요구하며 광화문농성도 하고, 이행점검위원회도 구성하며 지켜지지 않는 국가의 사회적 약속을 상기시키고 확인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권력의 얼굴이 바뀌었고 기후위기는 미래에 나타날 예상문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과제로 급부상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주체로 나선 발전비정규직 노동자들

▲발전노동자가 정의로운 탈석탄법을 제정하라는 기자회견에 함께하고 있다. ⓒ 공공운수노조
탈탄소정책을 세계 각국이 약속했고 한국도 그 흐름에 올라탔다. 그리고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계획이 제출되었지만 노동자들은 폐쇄된다더라는 소문으로만 소식을 알게 됐을 뿐, 정확한 과정과 이후 대책에 대해 알지 못했다. 새로운 정책에서 노동자들은 또 배제되었고, 가장 직접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의견제출권도 결정권도 없었다.
석탄화력발전소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과 지역주민들의 생활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권리를 망가뜨리는 흐름에 맡겨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기후위기는 거대한 사회적 문제이니, 우리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일자리와 삶터만 지키고 있자고 할 수도 없었다. 내 노동의 사회적 의미를 떠올리는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랬다.
김용균노동자의 죽음에 맞서 싸웠을 때처럼 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들로부터 시작하는 싸움이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길이 되도록 바라며 기후위기 대응에 주체로 나서기로 했다.
석탄화력발전소는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이 있었고 발전소비정규직노동자들은 석탄화력발전소 가동 중단 과정에서 누구도 피해입지 않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부족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대책은 생태적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너지산업이 개별 자본의 이익을 위해 생산해야 하는 목적이 포함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과정에는 관련 노동자들과 주민 시민들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검토되어야 하며, 대체 에너지 생산은 공공성을 바탕에 깔고 운영되어야 한다. 발전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소중한 일터인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를 동의한 이유는 이것이다. 폐쇄 동의라는 입장을 내오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폐쇄라는 결과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그러하기에 지금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진행과정을 보면 석탄화력발전소 폐쇄에 노동자들이 동의한다는 의미를 정부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내 일터가 없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전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동의한 것에는 어떤 이유로든 내 일자리만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유지되어야 하는 일자리의 의미를 생각했다. 기후위기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석탄화력발전소를 계속 가동했을 때 지구도, 인류도, 노동자도, 미래도 모두 사라질 상황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발전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민했고 '모두 같이 오래 평등하게'를 위해 선택했고 그 선택을 지지하고 함께 하는 시민들과 '정의로운 전환 대행진'을 2년째 해왔다.
발전비정규직노동자들의 요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요구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로 단 한명의 해고도 없도록 총고용보장 대책을 만들고 '정부-발전사-협력사-비정규직노조'의 논의기구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운영도 목적도 방식도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공공재생 에너지사업을 분명히 제기했다. 또 김용균투쟁의 약속을 지금 현실에 맞게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폐쇄되는 발전소 인력을 공공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5월 31일 '정의로운전환을 위한 노동자시민대행진'은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를 계기로 모두를 위한 에너지 생산과 운영 측면에서 사회적 대전환을 만들어가는 시간이다. 많은 목소리가 더 넓게 울려퍼지길 바란다. 투쟁의 현장이 발전소로 국한되지 않고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우리 생활 곳곳으로 전달되듯 우리의 요구와 투쟁이 확장되기를 바란다. 석탄화력발전소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정의로운 전환 요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정의로운 전환 투쟁이 되길 바란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531행진 전국지역 버스 안내 포스터. ⓒ 정의로운전환2025공동행동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김용균재단 운영위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