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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아침은 조용한 풍경화다. 동해 추암 해변의 해 뜨기 전, 모래는 파도가 남긴 문장을 품고 있다. 23일새벽, 모래 위에서 생전 처음 보는 생물 하나를 마주했다. 반점이 박힌 보랏빛 몸통, 부드럽게 접힌 귀처럼 생긴 돌기, 겉모습만 보고는 쉽게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혹시 죽은 물고기인가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천천히 숨을 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잉크처럼 퍼지는 보랏빛 액체를 흘렸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당황했지만, 그 순간부터 이 생물에 대한 궁금증이 시작됐다.

▲바다달팽이, 군소동해 연안의 생태적 건강성을 알려주는 지표생물, 바다달팽이의 생명을 오래 지켜보고 싶습니다. ⓒ 조연섭
나는 바로 AI에게 확인했다. 오류가 있을까 chat gpt, perplexity 두 곳에 자세한 프롬프트로 물어봤다. 이 생물은 "군소라는 해양 연체동물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연체동물 군소과에 속하며, 흔히 '바다달팽이', 혹은 '갯민숭달팽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달팽이와 같은 종류지만, 껍데기가 거의 퇴화되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부드러운 몸으로 해류를 감지하며 이동하고, 먹이는 주로 해조류다.
군소는 주로 5월에서 7월 사이 얕은 바다에서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이며, 특히 산란기를 맞아 해안 가까이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 시기 바닷가에서 종종 발견되는 이유다.
왜 하필 지금, 추암 해변에서 군소를 만난 걸까? 그 해답은 '수온'과 '해조류'에 있다. 군소는 수온이 15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한다. 5월은 딱 그 문턱이다. 여기에 산란을 위한 장소를 찾아 얕은 연안으로 접근하기에, 해류의 흐름에 따라 해변으로 밀려 나오는 경우도 많다.
군소는 위협을 받을 때 보랏빛의 '잉크'를 분비한다. 이것은 적을 혼란시켜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한 방어 본능이다. 수십 년 전 어촌에서는 이 잉크를 "바다가 내뿜는 먹물"이라 불렀고, 아이들은 이를 장난삼아 손에 묻히며 놀기도 했다.
▲동해 추암에 오른 바다달팽이 '군소'
동해 연안의 생태적 건강성을 알려주는 지표생물 공유 조연섭
이처럼 군소는 동해 연안의 생태적 건강성을 알려주는 지표 생물로도 볼 수 있다. 군소가 자주 발견되는 해변은 그만큼 해조류 생태계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다시 말해,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해안선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생명체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동해안 일대에서 전해지는 옛 어민들의 이야기에는 군소가 "바다를 살핀다"는 상징처럼 등장한다. 이 생물은 우리 지역의 자연사 콘텐츠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생태 교육 소재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식물이나 해양 생물에 전문 지식이 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바닷가를 맨발로 걷다 우연히 마주친 이 생물을 통해,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눈앞에서 직접 마주한 경험은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보랏빛을 품고 모래 위에 조용히 누운 군소.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너무 오래 잊고 지낸 과거를 소환하는 '자연의 문장'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