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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을 잘못 들인 탓일까. 좀처럼 앉아서 읽지 못한다. 한 손에 책을 들고 걸으며 읽는다. 이따금 놀라운 구절을 만나거나 머릿속이 복잡하게 되는 대목과 마주하면 걸음을 멈추고 서서 오래 생각한다. 하루 못해도 수 시간씩 걷고, 대중교통을 타고서 먼 거리를 오가길 즐기는 가장 큰 이유는 나다니며 책을 읽는 버릇 때문이겠다.

가끔은 낭패스럽다. 읽어야 할 책이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경우다. 때로는 책이 나와는 영 맞지 않아서, 또 때로는 책의 수준이 영 형편없어서 그렇다. 글을 쓰고 모임을 진행하는 일도 업 가운데 하나인 내게는, 마음에 차지 않는 책을 읽어야 할 때가 수시로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누군가 다가와 "뭐 이딴 책을 다 읽느냐" 한다거나, "몰랐네, 이런 취향이었어?" 물을 때면 괜히 이런저런 변명을 길게 쏟아내고는 한다.

이번도 그런 경우일까. 유독 만원 지하철을 탈 일이 많았던 이번 주, 나는 이 책 <창신동 여자>(2023년 9월 출간)를 들고 다녔다. 누군가 책모임에서 꼭 다루었으면 한다고 권해 지정도서로 선정한 때문이었다. 짤막한 한국소설이라기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유달리 책에 대해 묻는 이를 자주 만났다.

지하철에 타서 이 책을 읽을 때면 사람들이 유독 책 표지를 유심히 본다고 느낄 때도 잦았다.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입장 바꿔 나라도 읽는 이를 가만히 보았을 테다.

책 표지를 유심히 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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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나자빠져 뒹굴면 여자의 마음을 살 수 있을까'

보랏빛 작은 판형의 책 표지 위엔 위와 같은 스무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제목인 <창신동 여자>와 저자 이름은 표지가 아닌 책등에만 다소곳이 들었다. 표지에 적힌 문장은 그 내용처럼 저돌적이며 너저분하게 뒹굴고 있다. 책등에 든 제목이며 저자명과는 영 딴 판이라 어울리지 않는다.

창신동 여자 책 표지
창신동 여자책 표지 ⓒ 위즈덤하우스

사람들이 자주 보는 건 늘 표지의 글귀다. 그들이 '여자와 나자빠져 뒹굴기만 바라는 놈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듯 느껴진다. 실제로 무슨 제목이 그러냐며 농담 섞어 얼굴을 찌푸리는 여성도 여럿이었다. 민망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나는 이 책 <창신동 여자>를 조금의 부끄러움도 갖지 않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눈에 들어야 하는 책이라고, 단 한 명이라도 더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책을 읽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읽는 이 갈수록 줄어가는 이 시대에 그래도 활자를 읽는 일의 유익함이 무엇인가를 짚어본다. 나의 정신 따윈 아랑곳없이 세차게 휘몰아치는 영상의 시대에서, 오롯이 나의 노동과 나의 집중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독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핀다.

'낮고 낡은 곳에서' 퍼올린 이야기

<창신동 여자>는 이 시대 한 줌도 되지 않는 구술생애사 작가이자 소설가 최현숙의 글이다. 작가는 그나마 제법 되지만, 구술생애사는 정말이지 귀한 존재다. 나는 저 멀리 조지 오웰이야말로 구술생애사의 헨델쯤이라고 여기는데, 그건 그가 스스로 가장 낮은 곳에 가서 쓰고, 말하기 어려운 이들의 삶을 기풍 있게 전했기 때문이다.

대영제국 식민지 인도의 하급 관료로, 영국 대도시의 노숙자로, 랭커셔와 요크셔 탄광촌 노동자로, 오웰은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써내었다. 플로랑스 오브나의 <위스트르앙 부두> 같은 르포르타주가 그 후계를 자처하는 가운데, 한국에도 최현숙과 같은 작가가 있어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 이 시대 한 귀퉁이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출판사 책소개에 따르면, "<창신동 여자>는 요양보호사 및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일했고, 가난하고 '집'(갈 곳) 없는 사람, 특히 여성 홈리스의 생을 '듣고 적어온' 구술생애사 작가이자 반빈곤 활동가인 최현숙의 주제가 응축된 소설"이다.

 첫표지
첫표지 ⓒ 출판사

소설은 창신동 어느 여자의 이야기다. 여자의 이름은 지연, 명수란 이름의 사내와 창신동 비좁은 단칸방에서 함께 산다. 최현숙은 그 방을 이렇게 묘사한다.

가로 2.5미터, 세로 4미터 정도의 방. 방문과 마주 보는 벽 위쪽에 사방 30센티미터 정도의 창이 있기는 한데, 어느 겨울에 막아놓았을 낡은 비닐이 6월에도 그대로다. 2단짜리 서랍장과 그 위의 텔레비전, 선풍기와 전기밥솥이 세간살이라 할 것의 전부였고 모두 낡았다. 커다란 박스가 여러 개 있는 걸로 보아 당장 쓰지 않는 이불과 옷들을 그 안에 두고 사는가 보다. -10p

소설은 60대 요양보호사인 주인공이 이 방에 사는 이들과 만나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저 '열악하다'는 표현만으로 잡히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이 이 비좁은 방 안에 결박돼 세상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단 걸 독자는 이 글을 통하여 차츰 깨닫는다.

서울 창신동 주민자치센터 소개로 이곳에 파견된 요양보호사는 배울 만큼 배운 여자, 그녀는 어째서인지 더럽고 냄새나며 고되고 피로한 이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다. 소설이 끝끝내 내비치진 않지만 마치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을 만큼 내밀한 이야기는 그 건조한 문장에도 이 시대 실존하는 낮고 낡은, 곰팡이 펴 구역질나는 세상의 모습을 묘사해나간다.

처지가 다르면 알 수 없는 것... 왜 지연은 그를 돌봤을까

주인공이 마주한 남녀의 이야기는 도저히 감당되지 않을 만큼 엉망진창이다. 1946년생 거구의 노인 지명수는 뇌경색으로 편마비에 고혈압, 당뇨병, 심지어 치매초기 증상까지 겪고 있는 가난한 노인이다. 기초수급자에 장애등급까지 있는 그를 곁에서 돌보는 여자가 바로 지연이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리고 법적으로도 묶인 게 없는 60대 여성이 어째서 명수 곁에 머무는지를 서류만 들여다보아선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심지어 그녀는 주민등록조차 말소된 유령 같은 이로, 제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 없이 명수 이름으로 나오는 수급비를 받아 그를 돌보고 술을 사마시며 어찌저찌 살아왔던 터다.

 소설 속 주인공이 마주한 남녀의 이야기는 도저히 감당되지 않을 만큼 엉망진창이다. 1946년생 거구의 노인 지명수는 뇌경색으로 편마비에 고혈압, 당뇨병, 심지어 치매초기 증상까지 겪고 있는 가난한 노인이다.(자료사진)
소설 속 주인공이 마주한 남녀의 이야기는 도저히 감당되지 않을 만큼 엉망진창이다. 1946년생 거구의 노인 지명수는 뇌경색으로 편마비에 고혈압, 당뇨병, 심지어 치매초기 증상까지 겪고 있는 가난한 노인이다.(자료사진) ⓒ alexas_fotos on Unsplash

소설은 요양보호사인 주인공이 명수와 지연의 삶 가운데 들어서 일하는 과정을 1인칭 주인공시점에서 서술한다. 지연과의 미묘한 기싸움부터, 도통 적응되지 않는 이들의 삶에 적응해나가는 과정, 조금씩 흐려지는 요양보호사와 수급자, 피보호자 사이의 경계까지가 피부에 와서 닿는 일상적 사건들을 통해 묘사된다. 배운 이의 이성적 시선으로, 그러나 현장의 냄새를 그대로 맡는 노동자의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주인공은 명수와 지연의 삶 깊숙이 걸어 들어간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여럿이다. 그중 하나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지연에게 진료를 받고 필요한 처방약을 얻어주려 했던 순간이다. 보건소 의사에게 부탁해 어렵게 마련한 자리, 지연은 진료소에서 의사와 마주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튕기듯 일어나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의사가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았다면서요?"하고 물은 직후였다.

국민, 그 집단의 테두리에 속하지 않은 여자의 심경을 주인공도, 의사도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의 관심을 받아본 일 없는 들개처럼 아무렇게나 이빨을 드러내고 도망쳐버리는 지연의 마음을 그녀가 아닌 누가 안다 할 수 있을까.

소설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인상적 문장으로 형상화한다. 주인공이 지연과 관계를 개선하려 한글을 가르치려 했던 때다. 공책과 연필을 사다 주고 딱 이틀을 교육했는데, 처음엔 좋아하던 그녀가 더는 배우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다. 소설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갈무리한다.

'혹 내 어떤 태도나 표정 때문에 그만둔 걸까'를 여러 번 되돌려봤는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처지가 다르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일이 많다. -50p

집 안 구역질나는 지하실 발견한 것 같겠지만

<창신동 여자>는 하루이틀 출퇴근길 동안 읽어낼 수 있는 가벼운 소설이지만, 동시에 읽어내기 어려운 무거운 작품이기도 하다. 더럽고 불쾌한 환경뿐 아니라 너절한 쌍욕이 넘실대고 감수성 높은 독자에겐 버거울 성적 묘사, 인간과 사회의 깊은 어두움을 구태여 건드리는 시선 등이 하나하나 그러하다.

소설이 단 한 줄 적고 있는 문제로도 책 한 권이 거뜬히 나올 듯한 순간도 적지 않다. 최현숙이 과감한 결단으로 적을 것과 적지 않을 것을 구분하며 거침없이 나아간 결과로써 단촐한 외양을 얻었을 뿐이다. 구술생애사인 저자의 역량을 한껏 펼쳐 소설이 아닌 취재기를 적었다면 100페이지가 아니라 1000페이지도 거뜬했을 테다(물론 읽는 이의 수는 페이지에 반비례했겠지만).

소설은 계단식으로 읽는 이에게 충격을 던진다. 그 열악한 현실, 사회적 외면, 구조화된 부조리, 좀처럼 긍정하기 어려운 사연, 너절하고 추레한 인간상 따위가 하나하나 까발려지는 동안, 독자는 내 집 안 구역질나는 지하실을 발견한 듯 문을 닫고 영영 다시 열고 싶지 않은 충동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것이 답일까.

책을 읽는 일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효과적 수단이란 점이다. 인간은 익히 만나본 적도, 들어본 적도, 그리하여 알지 못했던 세계의 실존을 책을 통해 접한다. 그로부터 생각하고 공감하며 이해하게 된다. 그를 대하는 입장과 태도를 정립한다. 그 하나하나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윤리와 떨어져 있지 않다.

방 안으로 한 치도 들어서려 하지 않았던 사회복지사들, 그보다 못한 자세가 내 안에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똥을 지린 명수를 못 본 척 외면하던 주인공의 모습이 실은 그대로 나의 모습이란 사실도 인정할 밖에 없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창신동 여자>가 내게 유익한 작품이 되었단 게 신선하다. 처지가 다르면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단 건 그대로 진실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영영 다가설 수 없다는 뜻은 아니리라. 곰팡이 가득한 지하실 문을 여는 용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런 자세가 아니겠나. 최현숙의 글이 그저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님을 나는 이제야 똑똑히 알겠다. 책을 읽은 다른 이들도 나와 같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창신동 여자

최현숙 (지은이), 위즈덤하우스(2023)


#창신동여자#최현숙#위즈덤하우스#한국소설#김성호의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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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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