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1일부터 경남 산청, 경북 의성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산불로 수많은 인간과 비인간동물이 희생됐고, 그들의 터전 역시 잿더미로 변했다. 화마는 수령 900년의 아름드리 고목을 쓰러트렸고 천년고찰마저 집어삼켰다. 어디 그뿐이랴.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잿빛 공간에는 '재난 대응 노동자의 권리'도 바스락거리며 나뒹군다. 특히 최일선 현장에서 재난과 맞서 싸우는 산불진화대는 불안정노동자들의 위험천만한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들은 일터에서 필수적인 권리가 보장되지 않아 오히려 재난 대응에 취약해지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어 왔다.
무한 희생과 헌신 강요받는 산불 현장 노동자들
산불진화대는 크게 공중진화대(공무원), 특수진화대(공무직), 예방진화대(단기계약직)로 나뉜다. 공중진화대가 헬기를 이용해 공중에서 물을 뿌리면 특수진화대는 불길이 치솟는 골짜기까지 들어가 주불을 잡고 예방진화대가 잔불을 정리한다. 산림청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체 산불진화대(1만 143명) 중 예방진화대 인력은 95%인 9604명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6개월 남짓 단기계약직으로 지방자치단체에 채용돼 평소엔 산불예방 캠페인 활동을 하고 산불 현장에서는 잔불 정리와 뒷불 감시를 도맡아 처리한다. 그런데 이들은 전문인력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전문장비도, 직무교육도 지원받지 못 하고 있다. 게다가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이다.
반면 전문인력인 공중진화대와 특수진화대는 각각 104명, 435명에 불과해 고질적인 인력난을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 특수진화대의 경우 진화가 쉽지 않은 험준한 지형이나 야간산불 등 고난이도 산불 현장에 직접 투입되는 만큼 근무환경이 더욱 열악하고 위험하다. 화염으로 인해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구쳐 시야를 방해하고 유독가스를 내뿜는 데다 계곡에서는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뀌어 언제 어디로 불길이 번질지 예상하기도 힘들다. 그야말로 천지사방에 위험이 널려 있는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노동자 작업중지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제52조 제1항)" 또한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근로자에 대해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제52조 제4항)"고 적시했다. 법이 작업중지권을 사용자 일방이 아닌 노동자에게도 부여하는 까닭은, 위험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위험에 직접적으로 노출돼 생명·안전에 관한 권리를 현저하게 침해받는 당사자가 바로 현장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작업중지권을 사용자 고유의 권한으로 못박는다면 급박한 위험을 맞닥뜨린 노동자들의 즉각적인 대응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은 노동자로 하여금 위험작업을 즉시 중단하거나 회피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문제는 산불진화대처럼 재난 대응 임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경우다. 지난 4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작업중지권 실질 보장, 노동자 참여 산업안전보건법 개정방안 토론회' 발표 중 특수진화대원 신현훈(공공운수노조 산림청지회 지회장)씨의 현장증언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 산불재난특수진화대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오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가파른 비탈, 굴러떨어지는 돌, 주변을 가득 메운 연기,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불씨, 젖은 옷 속으로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 추워죽겠는데도 쏟아지는 졸음…."
보통의 작업장이라면 당장 작업중지명령을 내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현장이 누군가에겐 매순간 마주해야 하는 당연한 근무환경이었다. 산불진화대뿐 아니라 소방관, 치수관리 노동자, 도로보수 노동자도 마찬가지 상황에 놓여 있다. 이들은 화재, 홍수, 지진 등 재난 혹은 재난에 준하는 위급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위험을 떠안고 일해야 한다. 이렇게 위험이 '기본값'으로 통용되는 현장에선 노동자 작업중지권이 무용지물인 게 예삿일이나 다름없다.

▲2025.04.16. ‘작업중지권 실질 보장, 노동자 참여 산업안전보건법 개정방안 토론회’가 국회의원회관 제5간담회실에서 열렸다. 사진은 현장 실태 증언에 나선 신현훈 공공운수노조 산림청지회장의 모습 ⓒ 노동과세계, 송승현
재난 대응 인력에 충분한 권한과 자원을
재난 대응 노동자들은 왜 항상 죽음을 무릅쓰고 일해야 하는가.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 상황에 뛰어들어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는 이들에게도 작업중지권은 필수적인 권리로서 보장돼야 한다. 산불진화대는 기후위기로 인해 산불이 더욱 격렬하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정부가 효과적인 산불진화를 위해서 만든 조직이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예방진화대, 특수진화대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예방진화대는 공공근로 중심의 단기적인 운영에 치우쳐 있고, 특수진화대도 2년 주기로 실시하는 체력검정을 빌미로 사실상 계약직처럼 운영되고 있다. 재난안전을 담당하는 상시 전담인력이 없다면 위험을 즉시 파악해 상황을 전파하고 수습대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경험과 숙련을 쌓아 위험 상황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일이 더없이 중요한 이유다. 지금처럼 재난 대응 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정하고 처우는 열악한 상황이 지속되어선 전문성과 책임성을 겸비한 인력 양성을 기대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위험에 더 자주, 더 쉽게 노출되는 현장일수록 그 위험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를 보다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산불진화 업무처럼 위험에 직면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면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와 강도, 지속 시간 등을 낮추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산불진화 과정에서 확인된 여러 위험요소 중 현실적으로 완전한 제거가 불가능한 경우엔 그 위험을 허용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신현훈 산림청지회장의 이야기는 산불 현장에 안전인력이 절실함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서부지방산림청 한 국유림관리소 특수진화대원이 2박 3일 산불 끄고 돌아와서, 다음 출동에 도저히 산에 올라갈 수 없어서 내근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최소한 재난 대응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인력부족으로 몇 날 며칠 밤샘근무에 시달리거나 교대인원이 없어 위험상황에 장시간 노출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화재 진압에 필요한 전문장비와 직무교육도 중요하지만, 인력충원이야말로 고강도 고위험 업무에 갈려나가는 산불진화대원들에게 가장 절실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위험상황에서 능동적인 대처가 가능해야 한다. 재난과 사투를 벌이는 노동자라고 해서 목숨이 두 개일 리 없다. 스스로 위험을 인식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내 안전도 지키면서 다른 사람의 안전도 지킬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노동안전보건 월간지 <일터> 5월호에도 게재됩니다. 이 글의 필자인 임용현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