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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청년연합(1983-1992)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맞서 공개적인 정치투쟁을 벌였다.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 민담에 두꺼비는 뱀에게 대항했다가 잡아먹히지만 뱀의 뱃속에서 두꺼비 알이 부화해 뱀을 죽이고 그 자양분으로 수백 수천의 새끼 두꺼비들이 탄생하게 한다. 민청련 활동 중에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에 많은 민청련 두꺼비들이 세상을 떠났다. 윤석열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광장의 젊은이들은 아마도 그들 두꺼비들의 후손이 아닐까. 민청련 두꺼비들이 살아냈던, 때로는 애틋하고 때로는 안타까운 삶의 흔적들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민청련을 창립하고 초대 의장을 맡았던 김근태는 2003년에 구술을 남겼다. 한신대학교 연구팀이 수행하는 '한국사회운동 활동가 구술사' 프로그램에 응했던 것이다. 재선 국회의원으로 재임 중이던 때였다. 한 해 전에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는 등, 의회 정치인으로서 명망이 높았다.

김근태는 고교 3학년 때 겪었던 경기고 시위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근 40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1964년도에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있었는데, 내 가까운 친구들이 경기고등학교를 다 추동해서 다 끌고 나갔어요. 한일회담 반대 데모에서 기폭제였는데, 죽은 조영래 변호사가 같은 반 친구였는데 가깝고 가까우면서도 경쟁자였고, 학교 공부는 내가 좀 더 잘했고 대학은 조영래가 일등으로 갔는데, 이 친구 그리고 지금도 친한 신동수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들이 추동해서 나갔고."

 경기고등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 ?이것이 민족적민주주의드냐?? 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있다. 경향신문 1964.3.26
경기고등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 ?이것이 민족적민주주의드냐?? 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있다. 경향신문 1964.3.26 ⓒ 민청련동지회

1964년은 김근태가 열여덟 살 되던 해였다. 경기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고등학교 최종 학년이었으므로,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대학교 진학을 위해서 학업에 온 힘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그때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일본 양국의 국교 정상화 회담을 규탄하는 민중운동으로서 그해 연초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의 대외정책 때문이었다.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순응하여, 10년간 질질 끌어오던 한일 국교 정상화를 속히 타결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제6차 한일회담을 궤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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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후 담판이 있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 사이에 '김-오히라 메모'가 비밀리에 약정됐음이 밝혀졌다. 3억(무상) + 3억(유상,차관) 총 6억 달러를 받고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해준 것이다.

국민들은 굴욕감을 느꼈다. 1952년 이승만 정부가 공표한 평화선(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이 취소되는 것에 분노했고, 일본 자본의 경제 침략이 노골화함에 따라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을 우려했다. 대일 저자세 외교, 굴욕외교를 규탄하는 반대 운동이 터져나왔다.

6.3운동을 촉발시킨 경기고 시위

그해 3월 24일부터 학생들의 시위 운동이 고조됐다. '평화선 사수 절규', '연옥의 처형대에 세운 매국의 망령', '경찰대와 충돌, 투석도' 등의 기사가 일간지 1면과 사회면을 뒤덮었다. 시위대의 기세는 점차 거세져갔다. 가두 시위 3일째 되던 3월'26일에는 고등학생들도 거리에 나섰다. 특히 경기고 학생들의 가두 시위가 주목을 끌었다.

그날 오전 9시에 경기고교 학생 1400명이 교정에 모여서 성토대회를 연 후 10시부터 가두로 진출했다. '제2의 한일합방 결사반대',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드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대오를 지어 행진했다. 화신 앞(종로2가 사거리), 국회의사당(서울특별시의회 본관), 뉴코리아호텔 앞(서울시청 앞 광장), 을지로, 세종로 거리를 누볐다. 특히 뉴코리아 호텔 앞에서 한때 멈추고서는 "국내 매국상인을 규탄한다", "쪽발이는 물러가라", "영토의 한치도 줄 수 없다"는 구호를 외쳤다.

당시 사진을 보면 검은색 교복과 교모를 갖춰 입은 학생들이 한 줄에 열두세 명 정도씩 대오를 지어서 차도 한가운데를 행진하고 있다. 줄이 길었다. 멀리 보이는 도로 끝까지 대오가 가득찼다. 당시 경기고 한 학년 정원이 480명이었다. 보도 기사에 기재된 것처럼 시위자 수가 1400명이라면 1∼3학년 전교생을 망라했음에 틀림없다. 도로 옆으로는 시민들이 몰려서서 대오를 지켜보고 있었다. 학생과 경찰대 쌍방 사이에 긴장된 대치 양상은 보이지 않는다. 학생들은 3.1절 노래를 합창하고 만세를 삼창한 뒤, 학교로 되돌아갔다. 오전 11시였다.

경기고 시위는 폭발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김근태가 회고했듯이 '한일회담 반대 데모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제도가 있던 시절이었다. 경기고는 다른 학교의 경쟁을 불허하는 최우수 고교였다. 서열화된 고교 랭킹의 맨 윗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경기고 학생을 선망과 동경, 기대, 부러움 등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경기고 학생 당사자의 내면 의식은 드높은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근태의 술회에 따르면,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만드는 곳"이 경기고였다.

경기고 시위는 온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은 다른 고교생들의 시위를 촉발하고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가파르게 끌어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이 경기고의 뒤를 이었다. 배재고, 중동고, 마포고, 동도공고 등의 학생들이 시위운동에 나섰다. 나이 어린 고교생들의 가두 진출은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전 국민이 옳게 여기고 있음을 웅변하는 지표였다. 이 운동은 그해 6월 3일 박정희 정권이 선포한 비상계엄으로 군대에 의해 압살되기까지 그치지 않고 타올랐다.

주동자가 있었다. 김근태는 자신의 가까운 친구들이 경기고 시위운동을 이끌었노라고 회상했다. 특히 조영래와 신동수의 이름을 거명했다. 그들이 경기고 1-3학년 전교생을 추동하여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실현시켰다고 한다. 두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두 사람이 경기중학교 출신의 동계 진학자였기 때문이었다. 1964년 당시 경기고 3학년생 480명 가운데 79%에 해당하는 380명은 경기중학 출신의 동계 진학자였다. 그들은 6년간 내리 한 학교에 재학했으므로, 서로 잘 알고 있는 데다가 두터운 동류의식을 갖고 있었다. 또래 집단에 대해서 타계 중학 출신자에 비해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영래는 교내 비교과 동아리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그는 영자신문반, 영어성경공부, 불교학생회, 변론반 등 여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고교 3학년 때에는 학생자치기구에도 진출했다. 학생회 학술부장 직을 맡았다. 1964년 3월26일 경기고 시위에서 전교생을 동원할 수 있었던 역량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짐작할 만하다. 심지어 조영래는 학업 성적마저 출중했다. 경기중학교를 전교 3등으로 졸업했고, 뒷날 일이지만 1965년도 서울대학교 입시에서 법대 수석과 동시에 전교 수석합격자가 될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

신동수의 회고에 의하면, 경기고 3.26시위에서는 변론반 선후배 네트워크와 학생회 그룹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들은 시위의 필요성에 합의했고, 그 결행을 사전에 모의했다고 한다. 변론반 학생들이 행동대 역할을 했고,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드냐'라고 대서특필한 플래카드도 사전에 마련했으며, 시위 현장에서도 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시위에 반대한 김근태의 생각

"나는 안 나갔어요. 서너명 댓명 꼬셔서 안 나갔는데 외롭기는 했지마는, 아니 해방된 지 20년이 지났는데 나쁜 짓을 많이 한 일본이지만, 그쪽하고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곤란하잖아. 그때는 요런 단어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내가 느낌은 퇴영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것이라 교실에 몇 명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서너명 댓명 남겨서 교실에 남았는데 외롭기는 했는데, 내가 맞는 선택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1964년 경기고 3학년 당시의 김근태
1964년 경기고 3학년 당시의 김근태 ⓒ 민청련동지회

열여덟살 경기고 3학년생 김근태는 자기 학교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불참했다. 전교생 1400명이 교정에 모여서 한일회담 성토대회를 거행하는데도 꿈쩍하지 않았다. 교실에 머물러 있었다. '가까운 친구들'이 시위를 주도했는데도 그랬다. 오전 11시, 가두로 진출했던 학생들이 학교로 되돌아올 때까지 줄곧 교실에 남아있었다.

서너명 혹은 댓명 급우를 설득해서 교실에 남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운동장 성토대회를 위해서 일제히 교실 밖으로 나갈 때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가야 되느냐, 머물러 있어야 하느냐를 놓고서.

조영래와 김근태는 같은 3학년 2반이었다.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였지만 경쟁자였다. 김근태는 회상하기를, 학교 공부는 자기가 좀 더 잘했고, 대학교 입학시험은 조영래가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한다.

'1964학년도 김근태 생활통지표'가 남아있다. 경기고 3학년 1학기의 학업 성적이 기재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김근태는 3학년 2반 14번이었고, 학급 학생수는 58명이었다. 출석 상황은 개근이었다. 학업 성취도는 어느 정도일까. '교과학습 발달상황'이 적혀있다. 영어 세 과목(영독, 영작, 영문작), 제2외국어(독어), 수학 세 과목(해석, 해석2, 기하), 국어 세 과목(국어1, 고전, 문학사), 사회 네 과목(일반사회, 도덕, 국사, 지리), 그 외에 생물, 체육, 실업 등의 과목을 이수했는데, 17개 교과목 평균 점수는 88점이었다. 석차가 주목된다. 학급 전체 58명 가운데 2등이었다.

 1964학년도 경기고 3학년 2반 김근태의 생활통지표
1964학년도 경기고 3학년 2반 김근태의 생활통지표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대다수 급우들의 행동과는 달리 교실에 남아 있었을까. 그는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해방 전에 일본이 나쁜 짓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해방된 지 20년이 지났지 않은가. 양국간 국교 정상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웃 나라 사이에 우호 관계를 맺어서 함께 번영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게 김근태 생각의 골자였다. 국제관계를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방식이 아니라 당당하게 풀어가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는 심리적으로 우월감마저 느꼈다. 교실 밖으로 뛰어나간 동료 학생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은 채 부화뇌동하는 것일 뿐이라고 경멸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판단의 배경에는 1년 전 1963년도 대통령선거 유세 당시 윤보선 후보가 보여준 대미 굴종 외교노선에 대한 반감이 연관되어 있었다. 김근태는 고교 2학년생이라서 투표권은 없었지만 선거 유세를 유심히 관찰했다. 미국의 대 한국 원조 감소가 원인이 되어 경제가 어려울 때였다. 윤보선 후보는 "내가 당선되면 즉시 미국을 방문하여 내 몸을 인질로 하는 한이 있더라도 원조를 더 얻어오겠다"고 공언했다. 그에 반해 박정희 후보는 "민족의 긍지를 가져야지 인질이 되어서라도 원조를 받겠다는 식의 구걸식 원조는 받아서 안된다. 우리는 자주적 기초 위에서 미국 원조를 정당히 받아 계획성있게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근태는 윤보선 후보의 얘기에 모욕감을 느꼈다. 민족적 자존심을 돌보지 않는 사람을 지지할 수는 없었다.

경기고 시위에 관한 김근태의 회고담 속에는 놓쳐서는 안 되는 언급이 있다. 시위 참가를 거절하고 교실 안에 앉아 있다 보니 '외롭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마음 속에 갈등이 일었던 것이다.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자부심과 외롭다는 느낌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겼다. 그래서일까. 김근태는 자신과 더불어 교실 안에 남아있던 학생 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서너명 혹은 대여섯명이라고도 하고,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토로하고 있다. 마음 속 갈등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열여덟살 김근태 내면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 살 위 누나의 기억 속에도 당시 정황이 남아있다. 누나 김태자의 기억에 의하면, 동생은 두 가지 마음으로 인해 갈등했고 '판단이 안 섰노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결국 마음 속 갈등 때문에 데모에 합세하지 못했는데, 몹시 괴로워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임경석은 역사학자입니다.


#민청련#열전#김근태#2025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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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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