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을 연재하는 까닭은 자연과 인간, 삶과 사유를 잇는 다리로서 글을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며 만나는 풍경과 들꽃, 그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인문학적 질문과 깨달음을 붓글씨와 함께 풀어내며, 독자와 함께 마음의 결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40년이 넘도록 출판 편집 외길을 걸으며 수많은 문장과 씨름했다. 때로는 희열을, 때로는 절망을 맛보았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1000권이 넘는 책을 편집했다. 퇴근 후와 휴일 시간을 쪼개어 직접 쓴 책도 스무 권이 넘으니, 이제 감히 '책 장인'이라 칭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끊임없이 자기 일을 갈고닦는 사람을 '아레테(arete)', 즉 탁월함과 도덕적 수양을 갖춘 존재라 불렀다. 이 말이야말로 내가 평생 추구해 온 장인 정신의 본질이다.

젊은 시절, 패기 넘치게 종이사전 편찬팀에 합류했지만, 끈기와 집념으로 무장한 외골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지난한 편찬 작업에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마치 거대한 지식의 퍼즐을 맞추는 듯했던 당시, 표제어 하나를 놓고 밤샘 토론을 벌이던 사전 편찬자들의 열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들은 진정한 장인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의 거센 물결 앞에 종이사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 장인들은 하나둘씩 출판 현장을 떠나야 했다.

그 후, 원고에서 마주하는 오류의 빈도는 점점 늘어났다. 깊이 있는 검증 없이 손쉬운 인터넷 검색 결과만을 맹신하는 글쓰기 때문이다. 저자가 진실이라 믿고 쓴 내용이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달된다면, 책은 무지를 확산시키는 흉기가 될 수 있다. 무지는 깨우침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지만, 굳건한 믿음으로 포장된 오류는 더욱더 위험하다.

저자는 확신하고 편집자는 의심하고

AD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습니까?"

편집자로 일하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구양수의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에 더해 '다소통(多疏通)'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생각을 나누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열린 태도는 글을 더욱 명료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훌륭한 토양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글쓰기를 꽃 피우는 나무에 비유했다. 진실한 마음은 뿌리, 부지런한 노력은 줄기, 풍부한 독서는 진액, 넓은 견문은 가지와 잎이다. 꾸준한 수양과 깊은 성찰을 거쳐야 비로소 한 편의 온전한 문장으로 태어난다.

서점에 들어서면 글쓰기 관련 책들이 한 코너를 가득 채우고 있다. 대부분 비슷한 틀을 가지고 있지만, 실용적인 글쓰기에 초점을 맞추고 창의적인 사고보다는 효율적인 기술 습득을 강조하는 최근의 흐름을 반영하는 듯하다.

하지만 글쓰기의 기본적인 원리 몇 가지를 안다고 해서 능숙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수영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물에 들어가 직접 팔다리를 움직이는 연습 없이는 수영 실력이 늘지 않는다. 문장력 역시 끊임없는 훈련과 숙달 없이는 절대 향상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비법을 묻지만, 글쓰기는 마치 근육 운동과 같다. 꾸준함이야말로 글쓰기의 숨겨진 마법과 같다.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편집자는 최초의 독자이자 마지막 독자의 눈으로 꼼꼼하게 원고를 살핀다. 저자는 확신하지만, 편집자는 끊임없이 의심한다. 수많은 퇴고 과정을 거쳐도 완벽한 원고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옛말에 '교서여소진(校書如掃塵)'이라 했다. 맞춤법 하나, 띄어쓰기 하나가 책의 전체적인 품격을 좌우하고 독자의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 숙련된 편집자는 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쥐구멍 같은 오탈자를 찾아내기 위해 매의 눈으로 원고를 샅샅이 훑는다.

“소우주를 함부로 파괴하지 마라! 작가의 원고는 하나의 소우주다. “소우주를 함부로 파괴하지 마라!” 하지만 때로는 대수술이 필요한 원고도 있다. 이 피바다 교정은 그 치열한 흔적이다.
“소우주를 함부로 파괴하지 마라!작가의 원고는 하나의 소우주다. “소우주를 함부로 파괴하지 마라!” 하지만 때로는 대수술이 필요한 원고도 있다. 이 피바다 교정은 그 치열한 흔적이다. ⓒ 이명수

새로운 편집자가 입사하면, 나는 꼭 메모지를 준비하게 하고 '의/적/들/것' 네 글자를 받아 적으라고 말한다. 교정 작업의 핵심은 이 네 글자에 있다. '-의'는 불필요한 한자어 중심 표현, '-적'은 의미를 모호하게 하는 접사, '-들'은 습관적인 복수 표현, '것'은 문장을 길게 만드는 의존 명사이다.

이 네 가지 요소는 무심결에 우리의 문장에 습관처럼 달라붙어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된다. 마치 옷에 붙은 작은 먼지처럼, 그것들을 말끔하게 털어내는 순간 문장은 놀라울 만큼 간결하고 명확해진다. 편집자는 마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처럼, 매일 이 잡초들을 꼼꼼하게 뽑아내며 글이라는 아름다운 숲을 다듬는 사람이다.

"'의적들 것' 싹둑! 간결함이 힘이다."
"'의적들 것' 버려! 핵심만 남겨라."
"'의적들 것' 아웃!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만들라."

'의·적·들·것'은 퇴장! 문장의 살, 단어의 뼈, 사상의 심장을 남겨라. 의미를 덮는 건 꾸밈이 아니라 잡음이다.
'의·적·들·것'은 퇴장!문장의 살, 단어의 뼈, 사상의 심장을 남겨라. 의미를 덮는 건 꾸밈이 아니라 잡음이다. ⓒ 이명수

신입 사원들에게 나는 직접 자신만의 간결한 문장 다듬기 원칙을 만들어 책상 앞에 붙여 두고, 글을 쓸 때마다 끊임없이 되새기도록 주문한다. 마치 숙련된 조각가가 돌덩어리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정교하게 깎아내듯, 문장을 다듬는 일을 단순한 업무가 아닌 삶의 습관으로 체화하라는 의미이다.

'의/적/들/것'을 뽑아내야 하는 이유

어느 날, 출근했을 때 내 책상에 초고 교정을 마친 원고지 귀퉁이에 작은 포스트잇 하나가 놓여 있었다. 또박또박 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편집장님, 뽑고 뽑아도 끝이 없는 '의적들 것'들을 대체 어찌하오리까?"

밤새도록 교정 보느라 얼마나 애를 썼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일부러 차를 함께 마시면서 교정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하는데, 그 신입 사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더욱 재치 있었다.

"편집장님, '의적들 것'들과의 싸움은 마치 오뉴월 땡볕 아래 끝없이 펼쳐진 돌밭을 매는 고통과 같았습니다."

그 짧은 문장을 오랫동안 곱씹으며, 글을 고치고 다듬는 지난한 과정은 결국 그 돌밭을 묵묵히 매는 농부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심코 사용하는 '의/적/들/것'이라는 덫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그 불필요함을 능숙하게 제거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문장은 군더더기를 벗고 자기 고유의 단단한 몸을 갖게 된다.

'의적'이라 명명한 이유는, 마치 정의로운 도둑처럼 우리 말글살이 속에 깊숙이 숨어든 불필요한 요소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글쓰기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간결함을 되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사 '~의'는 우리 문장을 불필요하게 한자어 중심으로 경직되게 만드는 주범이다. 자연스러운 부사와 생동감 넘치는 동사는 자취를 감추고, 딱딱한 명사 덩어리만 남게 된다. 이는 일본어 조사 'の'나 영어 전치사 'of'의 습관적인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심코 사용하는 '~의'는 섬세한 감정 표현마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어, 한국어 고유의 유연하고 다채로운 표현력을 훼손한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의'가 고대 국어에서 다양한 격 조사로 사용되었으므로 일본어에서 직접 유래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국어의 문법 체계 안에서 볼 때, 과도한 '~의' 사용은 명백히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배달의 민족'이라는 익숙한 표현처럼,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명사 사이에 '~의'를 삽입하지만, 사실 '~의' 없이도 우리말은 훨씬 간결하고 명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글을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조차 그 어색함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배달(配達)'은 한문으로 '단(檀)'이며, 밝달나무를 뜻하는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정신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런데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배달의 민족'이라는 상호는, 일본식 표현인 '~의'를 무분별하게 삽입하여 '배달(配達)하는 민족'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먼, 어색한 표현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심코 쓰는 '-의'는 우리말의 간결성과 고유한 의미를 해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적'이라는 한자 접사는 전문 용어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복되면 문장 흐름을 막고 읽기 어렵게 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어의 영향이라고 한다. 딱딱한 '감성적' 대신 '마음이 따뜻한'으로, '사회적 문제' 대신 '우리 사회 어려움'처럼 구체적인 우리말이 더 효과적이다.

글 쓸 때 무심코 쓰는 '~적' 표현(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등)이 계속 나오면 문장이 딱딱하고 생기가 없어진다. 물론 우리말에서 조사 '~의'를 완전히 안 쓸 수는 없겠지만, 습관처럼 계속 쓰게 되는 것처럼 '~적' 표현도 참 벗어나기 어려운 습관인 것 같다. 마치 굳어버린 기계처럼 문장의 유연성을 해치는 주범이다.

복수형 접사 '~들'은 명사가 여러 개임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표현이지만, 현대 글쓰기에서는 굳이 복수가 아니어도 되는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 '생각들', '이야기들', '기억들'처럼 명사에 무분별하게 '~들'을 붙이면, 언뜻 보기에 문장이 풍성해 보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의미가 모호해지고 불필요하게 문장이 늘어지는 느낌을 준다.

더욱이 '많은', '여러', '각'과 같은 수량 형용사는 그 자체로 복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뒤에 굳이 복수 접미사 '~들'을 덧붙일 이유가 없다. 불필요한 '~들' 사용은 문장을 모호하게 만들고 늘어지게 하는 군더더기이다.

글을 마무리할 때 습관처럼 사용하는 일본식 표현 중 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것이다'로 문장을 끝맺는 방식이다. '~것이다'로 끝나는 문장은 단정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의존 명사 '것'이 문장의 의미를 흐릿하게 만들고 전체적으로 장황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군더더기 없이 과감하게 줄여야 문장의 핵심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번 몸에 밴 나쁜 버릇은 쉽게 떨쳐내기 어렵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어색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것이다'와 같은 표현은 간결하고 명확한 글쓰기를 위해 반드시 피해야 할 습관이다.

글쓰기를 완성하는 마지막 손길

인문학적 붓장난 人文, 그러니까 ‘인간다움의 무늬를 사유하는 공부'를 위해 내 배낭에는 항상 지필묵을 준비해 두고 있다. 여행길 또는 산행할 때 마음이 내키면 언제라도 지필묵을 펼치고 떠오르는 생각을 쓱쓱 적는다.
인문학적 붓장난人文, 그러니까 ‘인간다움의 무늬를 사유하는 공부'를 위해 내 배낭에는 항상 지필묵을 준비해 두고 있다. 여행길 또는 산행할 때 마음이 내키면 언제라도 지필묵을 펼치고 떠오르는 생각을 쓱쓱 적는다. ⓒ 이명수

첫 문장은 밑그림일 뿐이다. 진정한 글은 끊임없는 퇴고를 거쳐 생명력을 얻는다. 볼테르는 "완벽함은 목표가 아닌, 노력과 시도 속에 있다"고 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퇴고 끝에 군더더기는 사라지고 핵심만 남는다. 숙련된 조각가가 돌덩이 속 아름다움을 드러내듯, 우리도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야 한다. 퇴고는 '덜어냄의 미학'이며, 글쓰기를 완성하는 마지막 손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생각은 정제된 언어로 피어난다.

젊은 시절, 나는 한 달 만에 책을 쓰는 만용을 부렸다. 밤샘과 코피를 쏟아가며 쓴 글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종이와 잉크에 미안한 부끄러운 결과였다. <혼불> 작가 최명희 선생을 만난 후, 내 책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녀와 대화에서 치열한 창작 정신이 죽비처럼 나를 깨웠다. "쓰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로 시작하는 <혼불> 서문은 혼신의 힘을 다한 글쓰기의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쉼표 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완성한 그녀의 언어는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탁월했다.

윤오영 선생은 수필 <양잠설>에서 누에가 뽕잎을 먹고 실을 뽑아 고치를 짓는 지난한 과정을 글쓰기에 절묘하게 비유한다. 좋은 뽕잎처럼 좋은 책을 읽고, 깊은 잠처럼 깊은 사색의 시간을 거친 후, 비로소 자신만의 고치처럼 온전한 글을 써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 고치에서 끈기 있게 뽑아낸 섬세한 실처럼, 끊임없는 퇴고를 통해 우리의 생각은 비로소 아름다운 결실을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글쓰기는 결국, 자신만의 고치를 짓는 일이다.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아름답게.

#인문학적붓장난#아레테#간결한문장이힘이다#의적들것싹뚝#글쓰기의기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4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철학하는 바보』『깨달음을 얻은 바보』『동방우화』『불교우화』『한국인과 에로스』『중국인과 에로스』 등의 저서가 있음.

이 기자의 최신기사감나무 아래, 시간의 결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