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윤석열 ⓒ 대통령실
2024년 겨울,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비상계엄을 선포한 나라로 전락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독재 시대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 레드카펫이 펼쳐지면서 다시는 독재의 그림자를 밟지 않게 될 것이라는 진보 서사가 무너졌다. 12.3 비상계엄을 비롯한 내란 상황은 대한민국이 언제든 다시 독재로 퇴행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깨닫게 했다. 그 시간 동안 매일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되묻고 독재의 역사를 뒤적이며 참조점을 찾았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에 일어난 부산정치파동이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일으킨 친위쿠데타로 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성공했으나 12.3 비상계엄을 필두로 한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실패했다. 두 친위쿠데타의 성공 과정과 실패 과정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이를 비교해 한국 민주주의에 유의미한 참조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먼저 12.3 비상계엄이 다음 날 새벽에 바로 해제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겪었을 독재화의 현실을 이승만 대통령의 친위쿠데타의 폭력적 성공 과정을 통해 마주해 보자.
비상계엄, 정치적 악용의 선례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 해방과 함께 귀국했으나 국내적 정치 기반이 약했다. 그는 정당을 꾸리지 못한 채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소속으로 국회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50년 5월 30일 총선으로 제2대 국회가 개원하고 곧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제2대 국회에서는 무소속이 60%를 차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선거를 통한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이를 추진할 여당 창당에 나섰다.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원 설치를 담은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2월 23일에는 여당인 자유당이 창당했다.
이듬해인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했다.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 1표였다. 그러자 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 등 이승만 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관변단체들이 개헌안을 부결한 국회의원을 소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헌법에 국회의원 소환제 조항이 없어 "비민주적·반헌법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국회는 호헌결의안을 통과시키며 강경하게 맞섰다. 4월 17일에는 야당 국회의원 123명의 이름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40여 개 관변단체가 내각책임제개헌안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국회를 성토했다.
이승만 정부와 국회가 개헌안을 놓고 극한 대립을 보이던 중 내각책임제 개헌파를 이끌던 서민호 의원이 다툼 끝에 현역 대위를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5월 14일 국회는 서민호의 살인이 정당방위라며 찬성 94표, 반대 0표로 석방결의안을 가결했다. 결국 5월 19일 서민호가 석방되자 며칠 동안 부산 시내에서는 민중자결단, 백골단, 땃벌떼 등이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국회를 포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개헌에 앞서 국회에서 6월 2일에 대통령을 먼저 선거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러한 국회의 움직임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비를 소탕한다는 명목의 비상계엄 선포로 맞대응했다. "까닭 모를 계엄령"의 "속셈은 뻔한 것이었다."
친위쿠데타, 독재의 길을 열다
1952년 5월 25일 0시를 기해 부산을 비롯한 경남, 전남, 전북 등 3개 도의 23개 시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종찬 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종찬은 이를 거부하고 군의 정치 개입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이승만의 최측근인 헌병 대장 원용덕이 부산·경남 지역을 관할하는 계엄사령관을 맡았다. 특무대장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무기수와 중형수 7명을 공비로 위장시켜 부산 금정산 일대에서 총격을 벌이도록 조작했다. 원용덕은 헌병대, 특무대, 경찰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을 체포했다.
5월 26일 아침에는 47여 명의 야당 의원들이 통근버스에 탄 채로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공산당 자금의 국내 유입에 연루되었다며 국회의원 11명을 구속했다. 강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로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면은 수배되는 처지에 놓였다. 5월 27일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결의안을 의결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을 해제하지 않았다. 5월 29일에는 김성수 부통령이 국회의원 체포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했다.
6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정오를 기해 국회를 해산한다는 최후통첩을 국회에 보냈다. 하지만 6월 3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국 트루먼 대통령H. S. Truman의 경고 서한이 전달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으로 귀환한 무초J. J. uccio 주한미국대사가 부산으로 돌아갈 때까지 "돌이킬 수 없는 행동", 즉 국회 해산을 하지 말라고 압박했다. 그렇게 국회를 해산하고 다시 선거를 치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관철하려던 이승만 대통령의 시도는 일단 미국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집요했다. 6월 하순에 이르러 정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6월 20일에는 야당 국회의원과 재야인사 60여 명이 반독재호헌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하는 행사를 치르던 중 폭력배들이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6월 21일에는 이승만 정부가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해 헌법의 몇 개 조항만을 개정하는 발췌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6월 25일에는 야당 국회의원 김시현의 사주로 이승만을 저격하려다 실패하는 암살미수 사건이 터졌다. 이승만 정부와 여당은 야당 배후설을 퍼뜨리며 야당을 압박했다. 결국 야당 국회의원들은 발췌 개헌안에 대한 저항을 포기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카드는 개헌 의결에 필요한 국회의원 정족수를 채우는 일이었다. 먼저 등원을 거부하던 국회의원에게 안전 보장을 약속하며 국회에 와 달라고 압박했다. 구속 중인 10명의 국회의원도 석방했다. 이렇게 대부분 국회의원이 등원하자 경찰과 군대가 국회를 포위했고 여당 의원들이 나서 출입을 통제했다. 마침내 7월 4일 저녁 9시 24분 국회의원들은 기립표결에 들어갔다. 그 결과 재석의원 166명 중 163명 찬성으로 발췌 개헌안이 의결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을 공포했고 7월 19일 계엄령을 해제했다. 8월 5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친위쿠데타는 성공했고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
부산정치파동은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헌정을 유린한 최초의 사례였다. 정부와 국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 기반인 공권력과 관변단체를 총동원해 국회를 압박했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무력화시키면서 친위쿠데타에 성공했다. 그 후과는 엄청났다.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친위쿠데타의 성공은 장기 집권을 위해서는 비합법적 수단과 방법을 불사하는 독재 정치의 길을 열었다.
친위쿠데타를 좌절시킨 ʻ시민의 힘'
만일 12.3 비상계엄 상황이 지속되었다면 부산정치파동 그 이상의 비극적 상황을 마주했을지 모른다. 이승만 대통령의 친위쿠데타 성공을 뒷받침한 것은 극우 관변단체의 폭력을 동원한 관제 시위였다. 공권력은 국회의원을 협박하고 국가 기관을 침탈하는 그들의 편이었다. 이때 대학생들이 저항의 기미를 보이긴 했으나 전면적인 시민 저항은 없었다. 그런데 2024년 12월 3일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시민들이 국회로 달려가 무장한 군인들에 맞섰다. 그리고 겨우내 광장에서 윤석열 파면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친위쿠데타, 즉 내란을 지속하려는 시도를 좌절시켰다.

▲광장에 흩날리던 깃발 ⓒ 참여연대 김서인
친위쿠데타를 좌절시킨 시민의 힘, 그것은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부터 발원해 2000년대 촛불시위를 통해 응축된 것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고화의 길을 걸었다. 민주주의 공고화를 추동한 것은 '운동'이었고 그것을 제도화한 것은 '정치'였다. 그리고 운동과 정치 영역에서 민주주의 공고화를 이끈 주체는 '운동 사회'에서 배출되었다. 운동 사회는 1970년대 유신 체제에 반대하던 재야운동과 학생운동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1980년대에 민중 운동이 본격화되고 1990년대 시민운동이 성장하면서 운동 사회의 외연은 더욱 확장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운동 사회는 진보 정당을 결성해 국회 진출에 성공했고 진보·개혁 정권의 인적인 자양분 공급지가 되었다.
그런데 2000년대 운동 사회의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촛불을 들었던 시민이었다. 2016 촛불시위로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고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의 주류가 친일-독재-반공에 기반했던 보수세력에서 민족-민중-민주, 삼민의 기치 아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계보를 잇는 진보·개혁세력으로 교체되었음을 천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4년에도 시민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폐쇄적 독재국가로 전락할 뻔한 대한민국을 구했다. 다채로운 깃발과 반짝이는 응원봉으로 거리를 메운 시민들은 민주주의 위기를 막아냈고 자신들이 있는 한 민주주의 울타리는 견고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친위쿠데타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비교하고 민주주의의 견고한 성벽을 지켜낸 시민의 '힘'을 분석하면서 문득 이런 의문이 남았다. 지금 여기, 정작 위기에 처한 것은 보수세력이 아닐까? 12.3 비상계엄, 즉 친위쿠데타는 윤석열 개인의 일탈 행위에서 비롯되었지만 동시에 보수세력의 위기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이기도 하다. 반공의 시대가 저물었음에도 아직 그를 대신할 공통의 보수 이념을 구축하지 못하고 인물 프레임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며 극우의 논리와 조직에 경도되고 있는 보수세력의 위기, 그것이 민주주의 위기의 진범일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참여연대에서 발간한 〈참여사회〉 2025년 5-6월호에 실렸습니다. 필자는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입니다. 참여연대 회원가입 02-723-4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