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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역사는 바꿀 수 없고 과거는 고칠 수 없다. 그러나 소설의 개정판은 낼 수 있다. 지난달 29일 정세랑 작가의 단편집 <옥상에서 만나요>와 <목소리를 드릴게요> 개정판 출간을 기념하는 북토크가 서울 서교동에서 열렸다. 저녁 7시부터 시작하는 북토크에 퇴근하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시간은 이미 6시 50분. 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끄트머리나마 첫 번째 줄에 앉을 수 있었다.

대부분 앉아 있던 독자들은 두 단편집의 초판본이나 개정판, 혹은 각자가 생각하는 정세랑 작가의 대표작을 들고 작가를 기다렸다. 이날 북토크는 정세랑 작가는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거나 개정판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세랑 작가는 독자들과의 만남에 대해 "오래 알던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행사에서 독자에게 받은 선물도 자랑했다. 한 독자가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고 만든 지렁이 인형이었다.

완벽하지 못했더라도

지렁이 인형 정세랑 작가가 받은 독자의 선물. 정세랑 작가는 "독자마다 좋아하는 작품이 다르다"며 독자들과의 일화를 설명했다.
지렁이 인형정세랑 작가가 받은 독자의 선물. 정세랑 작가는 "독자마다 좋아하는 작품이 다르다"며 독자들과의 일화를 설명했다. ⓒ 한별

보통의 출간 기념 북토크는 작가의 세계를 마주한 독자들의 첫 반응을 시사하는 자리다. 공들여 지은 작품을 내놓은 작가에게도, 새로운 이야기를 접한 독자에게도 설레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개정판은 신작 발표보다는 관심이 덜한 편이다. 이미 있는 책을 교정하는 작업은 작가에게 필수는 아니다. 다시 고친다는 점은 부족함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정세랑 작가는 개정판 출간을 통해 무엇을 내보이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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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개정판 작업을 통해 과거의 문장을 교정하기도 하고, 그때는 사용했으나 지금은 쓰지 않는 단어, 지금의 관점으로 봤을 때 문제가 되는 표현 등을 고쳤단다. 분명 출간 전에 편집자와 함께 퇴고를 거듭했을 테지만, 늘 완벽한 책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정세랑 작가는 과거의 글쓰기에 대해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문장의 리듬감이 안정적이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개정판 작업을 통해 단어나 접속사, 문장 구조를 수정하고 이야기 밀도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정세랑 작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보였는데 세상이 서서히 바뀌는구나"를 용어를 통해 느꼈다고도 답했다. 그에게 개정판 작업이란 변한 세상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모든 책의 개정판 작업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라면서도, 이 책 개정판 작업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더욱이 이번 개정판은 국제산림관리협의회(FSC)인증 용지를 사용해 제작됐단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는 정세랑 작가의 철학을 제작 단계부터 담았다. 북토크에서 들은 바로는,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만약 책을 버려야 할 경우가 있다면 표지갈이를 할 필요 없이 그대로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으면 된다.

정세랑 작가는 표지 작업에도 의견을 냈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서난달 작가는 이번 협업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는 후문이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옥상에서 만나요> 개정판 도서 표지 <목소리를 드릴게요>(왼쪽), <옥상에서 만나요>의 개정판. 이번 개정판 표지는 서난달 사진작가의 작품이 장식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옥상에서 만나요> 개정판 도서 표지<목소리를 드릴게요>(왼쪽), <옥상에서 만나요>의 개정판. 이번 개정판 표지는 서난달 사진작가의 작품이 장식했다. ⓒ 한별

다정한 '정세랑 월드'... 이 작가의 다음 작업이 기다려진다

나와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첫 만남은 대학 수업 때였다. 단편집에 수록된 8개의 단편은 미래를 배경으로 했다가, 지금의 이야기를 했고 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곳을 마주하기도 했다.

정세랑 소설 이야기의 인물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다가 저들끼리 뜨겁게 사랑했다. SF라는 장르가 마니아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읽고 나니 이야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옥상에서 만나요>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책을 읽으며 일하다 지쳐 울고 싶을 때면 숨겨둔 편지를 찾으러 어느 건물 옥상에든 올라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다 읽고 나서 어딘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책을 덮은 후에도 소설의 세계는 계속 흘러 갔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다정하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다정한 세계로 함께 걸어가는 기분이 든다. 독자는 판타지와 SF의 경계에 있는 정세랑의 세계에 홀린 듯 자발적으로 들어간다. 그 세계는 다정한 동시에 어딘가 이상하다. 사고로 잘린 귀에서 과자가 자란다던가, 좋아하는 사람이 냉동 상태로 남겨진다. 독자는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놀라고, 차차 그 일에 적응해나간다. 책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나와 내 주변 인물들을 투영시키게 된다. 그렇게 몰입이 시작된다.

그런데, 읽다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비현실적이지는 않다. 예를 들면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실린 단편 '리셋'이 그렇다. 언젠가 우리도 외계에서 온 거대 지렁이를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현재 인류의 환경 파괴를 보면 그다지 먼 미래는 아닐 것 같다). '7교시'에서 미래의 인류가 지금의 식생활을 비판하는 것도 그럴듯하다. 기이하고 이상한 일들과 디스토피아를 예고하는 예측은 내가 살고 있는 지구와 이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나는,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는가?

정세랑 작가가 그리는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세상도 사랑한다고 한다. 동시대인들을 보며 감탄할 때가 많다고도 말했다. 좋은 사람에게 집중하는 타입이라 그런 게 분명하다. 이날 북토크에서 정 작가는, 소설 이후의 시점을 한 번 더 써보고 싶다고도 말해 많은 독자들을 설레게 했다.

정세랑의 대표작에 대한 논의는 뜨겁다. 누군가는 <지구에서 한아뿐>을, 또 누군가는 드라마로도 제작된 <보건교사 안은영>을 들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를 가장 좋아한다. 어쩌면 현재 활발히 출간하고 있는 역사 소설 시리즈인 <설자은> 시리즈가 장차 해리포터와 같은 세계관으로 독자들을 압도할 수도 있다.

정세랑의 세계는 아직 다 펼쳐지지 않았다. 지금 나온 책들 말고 앞으로 쓸 책에서 대표작을 고르면 된다는 편집자의 의견에도 공감한다. 앞으로 펼쳐질, 수 없이 많은 '정세랑 월드'가 기다려진다. 이 작품을 마주하는 작가와 편집자, 그리고 독자들이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지치지 않는 하나의 동반자가 되길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blog.naver.com/burn_like_a_star에도 실립니다.필자 블로그와 인스타그램(@a.star_see)에 취재 후기와 함께 공유됩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 (지은이), 창비(2025)


#정세랑#옥상에서만나요#목소리를드릴게요#창비#북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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