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장준하는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일용품을 챙기고 일기장을 모두 꺼냈다. 일기는 일군을 탈출하던 1944년 7월 7일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써 온 일곱 권의 노트였다. 이것을 써 놓은 다행스러움이 마음을 떨리게 했다. 실히 소포 하나는 될 분량이었다. 다음으로 자신이 만든 <등불> 다섯 권과 <제단>의 제1호와 채 제본이 끝나지 않은 2호였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정성이, 나라사랑이 깃들여 만들어진 잡지였다. 아내와 부모와 민족과 이웃과 친구와 동포와 송두리째 조국을 빼앗긴 자신으로서는 모든 애정을 기울인 단 하나의 대상 그것이 <등불>이요, <제단>이었다.

장준하는 망명지에서 피땀흘리며 제작한 잡지와 일기장을 소포로 만들어 아내에게 보내고자 김준엽 동지를 찾아갔다. 마침 그가 자리에 없어서 진중에서 갓 결혼한 부인에게 맡기면서 "불원간에 국내로 떠나게 될 터인데 내가 죽은 것이 확인된 뒤에 이 주소로 부쳐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김준엽은 그 무렵 이범석 장군의 비서인 민영주와 결혼하여 신접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민영주는 김구 주석의 비서실장 민필호의 딸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아리따운 규수였다.

AD
이와 같은 장준하의 비장한 행동에 대해 뒷날 역사학자 조동걸은 한 연구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에서 장준하의 신념의 인간성과 지도자적인 인격을 선명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장준하는 자기 생애를 '제단'에 바칠 고집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머리를 깎고 숙연한 태도로 출동 단념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7권의 일기와 5권의 <등불>과 2권의 <제단>을 묶어 고향의 아내에게 보내게 하고 나머지 사물은 불태워 없애 버렸다. 이 신념의 고집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장준하는 자기가 출동을 단념하면 전체의 작전도 망가지고 무엇보다 전 대원이 동요하여 OSS작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그의 책임감에 찬 지도자의 인격을 감동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조동걸, <장준하의 독립운동>)

장준하는 일기장과 손수 만든 잡지를 소포로 묶어 아내에게 보내도록 하는 등 신변을 정리하면서 아내와 부모형제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유물처럼, 유언장처럼 자신의 혼이 깃든 '작품'을 고향으로 보내도록 한 것이다. 이 장준하의 '유품'은 해방 뒤 김준엽이 귀국할 때 소중하게 가져와서 본인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6.25전쟁 중에 분실되었다. <제단>은 미주의 독립운동단체에도 우송을 했기 때문에 혹시 남아있어서 찾게 된다면 우리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8월 7일 김구 주석과 이청천 광복군총사령관이 약속대로 두곡을 찾아 훈련대원들을 격려하러 왔다. 장준하는 "사랑하는 조국의 아들이 죽으러 가는 훈련을 받으며, 죽음을 선택해 가는 마당에 찾아오신 김구 선생의 그 모습은, 핑그르 눈물이 도는 격려였다."라고 회고했다. 다음날에는 미군 다노반(Gen, Donavan) 소장이 사전트 소령과 함께 병영을 찾아와 출전준비 상태를 점검하고, 김구 주석과 이청전 사령관, 이범석 장군 셋이서 장시간 구체적인 전략을 논의했다.

다음날 대원들에게 특별 대기령이 내려졌다. 이제 출발시간이 된 것이다. 살기 위하여 죽을 곳으로 가는 출발이다. 통신장비, 무기와 식량, 일본국민복과 일본인신분증, 약간의 금괴, 일본제 신발에 이르기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입대한 이래 이렇게 호사스런 군장을 갖추기는 처음이었다. 미군 비행기로 한국 어느 산악지대에 투하할지, 잠수함으로 어느 해안에 상륙할지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출발은 초 읽기에 들어갔다. 서해안을 통해 입경하게 될 것으로 추정할 뿐이었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도깨비 함석헌'이 필자로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