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에서 본 영암읍내와 월출산 풍경. 45년 전 그날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가만히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 이돈삼
전남지역 5·18민주화운동은 공수부대의 도청 앞 집단 발포를 기점으로 본격화됐다. 광주와 함께 민주주의를 외친 목포, 나주, 화순, 강진, 해남, 영암, 무안, 함평 등 8개 시·군 29곳이 5·18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지난 4일, 이곳들을 찾았다.
1980년 당시 5월 21일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가 영암 신북버스터미널과 신북장터에 도착했다. 버스 4대에 탄 시위대는 곧바로 신북지서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를 획득했다. 신북 버스터미널과 장터는 나주와 영산포를 거쳐 내려온 시위대가 영암-강진-해남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신북은 시위 차량이 모여 서로 상황을 묻고 소식을 전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당시 신북장터는 지금의 신북삼거리에 있었다. 시장 상인과 주민들은 박수를 치며 시위대를 응원했다. 신북․시종지역 학생과 청년들이 자체 시위대를 편성하고 총기 확보에 나설 것을 결의한 곳도 여기였다.

▲나주와 영암을 이어주는 국도의 신북삼거리. 45년 전 당시 신북장터가 열린 곳이다. ⓒ 이돈삼

▲5.18사적지 표지석에 세워져 있는 영암읍 삼거리. 영암읍에 온 광주 시위대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다. 영암읍 삼거리는 나주와 강진을 이어주는 길목이다. ⓒ 이돈삼
시위대는 신북에서 영암읍으로 달렸다. 영암읍 사거리에 도착한 시위대는 유리창이 다 깨진 버스를 각목으로 두드리며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멀리서 시위대를 본 주민들은 처음에 경계했다. 부랴부랴 가게 셔터를 내리기도 했단다. 시위대를 계엄군으로 잘못 알고 한 행동이었다.
시위대는 광주에서의 계엄군 만행과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참상을 알리며 시위 동참을 호소했다. 읍내 유지들은 군청 앞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시위대가 전한 광주 참상은 읍내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주민들이 군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청년들은 시위용품을 준비했다. 상인과 주민 상대로 성금을 거둬 현수막과 머리띠를 만들고 각목을 샀다. 상설시장이 가까이에 있었다. 곧바로 궐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영암경찰은 광주로 차출돼, 읍내는 무방비 상태였다.
시장 상인들은 시위대에 식사를 제공했다. 읍내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주민 10여 명이 1만 원씩 갹출했다. 상인들은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고, 홍운식당에 모여 김밥을 말았다.
광주 시위대는 '광주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읍내를 떠났다. 청년들이 버스 2대를 몰고 와 '광주시민을 도우러 가자'고 외쳤다. 순식간에 버스가 청년으로 가득 찼다. 버스는 군민의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광주로 향했다.

▲신북면사무소 전경. 신북버스터미널 사적지 안내판이 여기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시종면사무소. 당시 시종지서가 있던 곳으로, 청년들이 지서 뒷산에 숨겨놓은 총기류를 얻은 곳이다. ⓒ 이돈삼
24일 무기 반납 때까지 이뤄진 영암의 5·18민주화운동은 3개 축으로 전개됐다. 신북고등학교 학생과 청년들 시위, 신북지역 청년의 광주효천 시위, 읍내 유지의 지원을 받으며 나주까지 진출한 영암청년 시위 등이다.
21일 신북면에서 광주 시위대로부터 공수부대의 광주학살 소식을 전해 들은 이달연·유은열·이영일 등은 승용차를 타고 영암에서 차량시위를 벌였다. 신북고등학생 박재택과 최항우·박찬재 등은 시종면 금지저수지에서 만나 시위 참가를 결의했다. 이달연 등은 금지저수지 부근에서 박재택 일행을 만났고, 서호면 학파농장에서 2.5톤 트럭을 몰고 나왔다.
방위병으로부터 '지서에서 땅에 묻어놓은 총기류가 시종지서 뒷산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들은 22일 저녁 땅을 팠다고 한다. 지서 뒷산에서 나온 총기류 290여 정을 나주군청 앞으로 옮겨 다른 시위대에 넘겨줬다.

▲영암군 도포면 상리제에 세워진 5.18사적지. 상리제는 신북고 학생과 청년들이 다량의 실탄을 획득한 곳이다. ⓒ 이돈삼

▲영암군 도포면 상리제. 45년 전 긴장된 그 순간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 이돈삼
23일 오전 박재택·이영일 등 신북고 학생과 청년들이 트럭을 타고 도포면 구학리 상리저수지 옆을 지날 때였다. 도로 반대편에서 탈탈거리며 오는 경운기가 왠지 꺼림칙했다. 경운기에 타고 있던 도포면 예비군중대장 박금호와 방위병도 시위대의 눈길을 피했다. 청년들이 트럭을 돌리고, 경운기를 멈춰 세웠다. 예비군중대장과 방위병이 경운기 짐칸의 거적을 다시 매만졌다.
"거기, 뭣이요?"
"아무것도 아니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시위대가 거적을 걷어냈다. 다량의 실탄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25상자, 실탄이 자그마치 2만3000여 발이나 됐다.
시위대한테 무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예비군중대장과 방위병이 실탄을 옮기는 중이었다. 시위대는 경운기에 있던 실탄 상자를 모두 트럭으로 옮겼다. '큰힘'을 얻은 시위대는 역리 삼거리에서 광주로 가는 시위대에 이를 나눠줬다.

▲영암 도포 실탄 탈취 현장 부근 약도. 당시 수사팀이 박재택 등을 조사하면서 그린 것이다. ⓒ 이돈삼

▲5.18사적지로 지정돼 있는 영암읍 사거리.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가 광주에서의 계엄군 만행과 시민 참상을 알리며 영암군민의 시위 동참을 호소한 곳이다. ⓒ 이돈삼
영암지역 무기회수반과 마주친 건 그때였다. 학생과 청년들은 무기회수반에 의해 영암국민학교로 유인돼 무장해제됐다. 박재택과 이달연은 그해 12월 군사재판에서 내란실행 부화뇌동, 포고령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수사팀이 박재택과 이달연을 조사하면서 그린 '도포 실탄 탈취 현장과 도포지서 부근 약도'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강덕진 등 신북청년 40여 명도 광주시민을 돕기 위해 팔을 걷었다. 나주 왕곡에서 버스를 구하고, 청년들을 모으려고 읍내에 갔다. 군민이 크게 환영하며, 차량에 '영암신북'이라고 써줬다. 청년들은 다시지서에서 총기를 획득하고, 나주를 거쳐 광주로 가 효천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며 싸웠다. 광주 외곽에서 차량시위를 하던 중 20살 노치운이 사망했다.
영암읍 청년들은 도갑사에서 몰고 온 버스 2대에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철폐하라'고 쓴 현수막을 내걸고 광주로 출발했다. 청년들의 시위 참가는 상록회장 최철환, 번영회장 김희규 등 지역유지들의 묵인과 협조 아래 이뤄졌다.

▲5.18사적지 표지석에 세워져 있는 영암읍 삼거리. 영암읍에 온 광주 시위대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다. 영암읍 삼거리는 나주와 강진을 이어주는 길목이다. ⓒ 이돈삼

▲영암군청. 예나 지금이나 영암지역 행정의 중심공간이다. ⓒ 이돈삼
강진과 해남지역 시위대도 광주로 가는 길에 영암읍에 들렀다. 영암은 광주와 전남 서남부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불안감을 느낀 읍내 유지들이 22일 오후부터 수습활동에 나섰다. 치안을 명분으로 청년 시위대로부터 총기를 회수했다. 역리 삼거리 등에서 경계를 서며 다른 지역 시위대의 읍내 진입도 막았다. 읍내 유지들은 24일까지 총기류 500여 정과 수류탄 11발, 다량의 실탄을 거둬들였다.
김희규 번영회장은 처음엔 시위대를 지원하고, 나중에는 수습활동을 했다. 5·18이후 전남도지사 감사장을 받았다. 하지만 시위대 지원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구속됐다. 김희규는 80년 12월 소요죄, 내란음모방조, 특수절도 등의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영암읍 사거리와 역리 삼거리, 옛 신북장터, 신북버스터미널 입구, 시종파출소 앞, 도포 상리제가 5·18전남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영암군 도포면 상리제에 세워진 5.18사적지. 상리제는 신북고 학생과 청년들이 다량의 실탄을 획득한 곳이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매일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