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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아들과 자동차 세계여행을 하다 갑자기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대에 선발된 아빠, 2024년 12월부터 약 1년간 남극기지에서 대기과학 연구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씁니다.
2024년 12월 3일, 남미 대륙의 끝자락 푼타아레나스를 출발한 남극행 비행기가 드디어 킹조지섬의 활주로에 착륙했다. 한국을 떠난 지 닷새 만에 도착한 이곳은, 서울에서 1만 7240km 떨어진, 지구 반대편이었다.

남극행 전세기 동절기에는 쇄빙선을 제외하면 남극 킹조지섬으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남극행 전세기동절기에는 쇄빙선을 제외하면 남극 킹조지섬으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 오영식

우리는 곧장 세종기지로 향하기 위해 러시아의 벨링스하우젠 기지 앞 해변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1년간 이곳을 지켰던 37차 월동대원들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런데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사이, 한 대원이 다가와 믿기 힘든 소식을 전했다.

"조금 전에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됐어요. 국회 정치 활동 금지 포고령도 내려졌대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농담인 줄 알았다.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37차 대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했고, 정말 사실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변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대원들 모두 얼어붙은 듯 말을 잃었다. 교과서에서나 접하던 '계엄령'이라는 단어가, 지구 반대편 남극에서 현실이 되어 다가온 순간이었다.

남극에 도착하자 들려온 계엄령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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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는 휴대폰도,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정확한 사정을 알 도리가 없었다. 놀란 마음을 안고 조디악에 올라 거센 파도를 헤치며 세종기지로 향했다. 기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을 연결해 뉴스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계엄령 선포' 속보는, 우리가 비록 지구 반대편에 와 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걱정을 해도, 남극에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한민국의 상황은 시시각각 급변하고 있었지만, 기지 안에서는 예정된 일정대로 업무가 계속됐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37차 대원들과의 인계인수를 마쳐야 했고, 하계연구원들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긴 겨울을 대비한 준비 작업도 차곡차곡 진행해야 했다. 정치적 격랑과는 무관하게, 남극의 연구는 멈출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이어지던 중,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만장일치로 인용했고, 후임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6월 3일로 확정됐다는 내용이었다.

세종기지 이정표 세종기지는 서울에서부터 1만 7240km 떨어져 있다
세종기지 이정표세종기지는 서울에서부터 1만 7240km 떨어져 있다 ⓒ 오영식

우리가 인천공항을 떠난 날은 2024년 11월 28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통령 선거는 예정되지 않았고, 당연히 어떤 대비도 할 수 없었다. 사전투표를 하거나 선거인 등록을 할 기회조차 없었던 우리는, 이후 지구 반대편 남극에서 선거 일정이 갑작스레 확정되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곳 세종기지는 우편물의 수·발신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가장 가까운 재외공관이 있는 칠레의 산티아고까지는 약 3000km나 떨어져 있다. 거리도 문제지만 항공편조차 없어 현실적으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성인이 된 후 한 번도 선거를 거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손을 놓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안타까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직선거법 조항을 일일이 찾아보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도 직접 문의를 해봤지만, 돌아온 답은 같았다. 현재의 제도 아래에서는 남극 세종기지에서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더욱 씁쓸해졌다.

국민은 있지만 투표는 못하는 곳

제38차 월동연구대 여름(12월~2월)이 끝나면 월동대 18명이 빙하와 바다로 고립된 기지를 1년간 지킨다
제38차 월동연구대여름(12월~2월)이 끝나면 월동대 18명이 빙하와 바다로 고립된 기지를 1년간 지킨다 ⓒ 고용수
과학을 선도하고, 주변 국가의 이목을 받는 이곳조차,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부당하게 느껴졌다. 세종기지에는 현재 18명의 월동연구대원이 근무 중이다.

기지를 총괄하는 대장(김원준)을 비롯해 행정과 운영을 맡는 총무, 대기·우주·해양·생물·지질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원들, 그리고 의료를 책임지는 의사까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문가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전기와 전기 설비를 관리하는 기술자, 건설 장비를 운전하는 중장비 기사, 대원들의 세 끼 식사를 책임지는 요리사, 현역 군인과 공무원도 포함되어 있다. 출신 지역도 서울과 경기, 부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제주 등 전국 각지에 걸쳐 있어, 이곳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극은 남극조약에 따라 어느 나라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고, 군사활동과 상업적 이용 역시 금지된 지역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국이 자국의 기지를 마치 영토처럼 운영하고 있다. 각 기지 입구에는 해당 국가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고, 허가 없이 출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세종기지도 예외는 아니다. 기지에는 KT가 설치한 위성 안테나를 통해 인천 지역번호인 032번으로 국내 통화가 가능하다. 기술적으로는 대한민국과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선거 제도만큼은 아직 이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KT 위성 안테나 이 안테나를 통해 국내와 자유롭게 전화를 이용할 수 있다
KT 위성 안테나이 안테나를 통해 국내와 자유롭게 전화를 이용할 수 있다 ⓒ 오영식

공직선거법을 살펴보다 보니 '거소투표'와 '선상투표'라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거소투표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병원 입원 환자, 도서 산간 지역 주민 등이 사전 신청을 통해 우편으로 투표할 수 있는 제도다. 하지만 세종기지는 우편물의 수·발신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없다.

반면, 선상투표는 선거 당일 선박에 승선 중인 선원들이 전자팩스 등을 통해 투표하는 방식이다. 남극 세종기지는 비록 선박은 아니지만, 지리적 고립성과 통신 환경 등 여러 면에서 선상 근무와 유사한 점이 많다. 제도만 조금 보완된다면, 남극에 근무 중인 월동대원들도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생긴다.

킹조지섬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총 8개국이 상설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종기지와의 교류를 희망하며 먼저 연락해오는 기지들도 점점 늘고 있다. 그만큼 대한민국은 남극에서도 주목받는 국가이며, 점차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외국 대원들과 대화하다 보면 K-팝 아이돌부터 반도체와 조선 산업, IT 기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다양한 분야에 대해 감탄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세종기지에 방문한 외국인 연구원 세종기지는 외국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세종기지에 방문한 외국인 연구원세종기지는 외국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 오영식

남극에서도 투표할 수 있길 바란다

이처럼 세계의 주목을 받는 대한민국이라면, 이제는 '투표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지구상 가장 먼 곳에 있는 국민에게까지 보장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우리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다음 선거만큼은 이곳에 있는 후배 대원들이 꼭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국에서는 거리마다 대선 후보자의 선거운동을 지켜보며 공약을 비교해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남극에서 차디찬 빙하를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지구의 끝자락에서 매일 힘차게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며 생활하고 있지만, 선거철이 되니 '한 명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더욱 깊이 다가온다.

뉴스를 통해 누가 대통령 후보인지, 어떤 공약이 오가는지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비록 직접 한 표를 행사할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투표는 단순히 정치 참여를 넘어, 국민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중요한 상징이기도 하다. 언젠가 남극에서도 투표할 수 있는 날,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월동연구대는 펄럭이는 태극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세종기지 국기게양대의 태극기 대원들은 매일 아침 태극기를 보며 연구실로 향한다
세종기지 국기게양대의 태극기대원들은 매일 아침 태극기를 보며 연구실로 향한다 ⓒ 오영식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아들 손잡고 세계여행”)와 유튜브 채널(“오씨튜브”)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남극#참정권#투표#세종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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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6.3 대통령선거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남극세종과학기지 대기과학 연구원,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강연 합니다. 지금까지 6대륙 50개국(아들과 함께 42개국), 앞으로 100개국 여행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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