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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엄마의 생신을 앞둔 주말에 대전에 있는 친정에 내려갔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탓에 이럴 때라도 부모님을 살펴드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드리자는 마음에서 생신 하루 먼저 내려갔다.
올해 86세이신 부모님은 두 분이 서로 의지하면서 아직은 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계신다. 부모님이 요양원에서 몇 년째 고생하고 계신다는 지인들의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요즘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특별한 취미가 없고 바깥 활동도 거의 안 하시는 부모님은 하루종일 TV 앞에 앉아계신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뵈어야지 하다가도 생기가 없는 집안 분위기와 하루종일 시끄럽게 울리는 TV 소리, 그리고 어디가 아프다는 얘기를 계속 들어드려야 할 생각을 하면 부모님 댁에 가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엄마는 매일 집안일을 하시니 힘들다고는 해도 그런대로 활력이 있으신데, 무료한 일상을 보내시는 아버지는 몸도 마음도 더 빨리 늙어가시는 것 같다. 젊은 시절 호기롭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86세 아버지의 신나는 일

▲11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와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 8이닝을 무실점 호투로 마친 한화 선발 와이스가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 아버지에게 요즘 신나는 일이 생겼다. 바로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팀이 파죽지세로 12연승을 달성한 것이다. 아버지는 스포츠를 아주 많이 좋아하신다. 젊은 시절에는 축구와 배구를 비롯한 웬만한 구기 종목은 직장 대표 선수로 뛰실 만큼 잘하셨다.
아버지는 모든 경기의 중계방송도 빼놓지 않고 챙겨보셨는데, 그 바람에 우리 형제들도 새벽에 방송되는 국가대표 경기를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함께 보고는 했다. 그 덕분에 나도 어지간한 종목의 경기 규칙은 물론이고, 어려운 전문 용어까지 훤하게 꿰고 있다.
아버지는 대전이 연고지인 한화이글스팀의 오랜 팬이시다. 야구를 좋아하시는 데다가 고향 사랑이 남다르신 아버지의 한화에 대한 팬심은 그동안 경기 성적이 부진했을 때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으셨다.
프로야구 시즌인 봄부터 가을까지는 매일 TV에서 중계되는 한화의 경기를 챙겨보시는 재미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찾으시는데, 12연승을 할 때만 해도 한화가 성적이 좋으니 아주 행복해 하신다. 매일 저녁 야구 경기를 보시고 한화팀이 이기면 엄마에게 자랑을 하시는데, 야구에는 관심이 없고 드라마만 좋아하시는 엄마는 늘 시큰둥해 하신다고 불만이시다.
나도 재작년부터 프로야구를 보기 시작했다. 야구는 경기 시간이 길고 지루해서 어느 팀이 이기든 경기가 9회초로 종료되기만을 기다렸던 내가 LG 트윈스 팬인 딸내미 때문에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덩달아 LG팬이 되었다.
야구장에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TV 화면에 비춰지는 야구장의 열기는 대단하다. 팀을 응원하는 구호를 외치고 선수들마다 응원가를 불러주며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관중들의 모습을 보면 내 엉덩이도 따라서 들썩거린다. 같은 팀의 경기를 찾아서 보다 보니 이제는 선수들의 응원가도 다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번에 가면 아버지를 모시고 야구장에 가는 건 힘들더라도 치맥을 먹으며 함께 야구중계를 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정에 가는 날에 하필 비가 내렸다. 나의 이벤트를 도와주지 않는 날씨를 원망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한화팀이 고척돔에서 경기를 하는 순서라서 경기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까

▲9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한화는 키움을 7vs5로 꺾고 10연승 행진에 성공했다 ⓒ 한화이글스
치킨은 배달 주문하고 골뱅이무침도 만들고 술을 못 드시는 아버지를 위해서 무알코올 맥주도 준비해서 TV 앞에 저녁상을 차렸다. 아버지에게 치맥이 뭔지도 알려드리고 맥주잔도 부딪치며 즐겁게 경기를 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한화의 연승 행진을 자랑하시던 게 무색하게 그날(9일)의 경기는 초반에 홈런을 4개나 맞으며 고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타석에 나오는 한화팀 타자들 한 명 한 명의 특징과 전적은 물론이고 상대팀 선수들에 대해서도 얘기하셨는데, 거의 전문 해설가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한화팀의 10연승을 기대하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다르게 경기가 흘러가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경기를 같이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아버지는 더 흥이 나시는 것 같아 보였다.
질 것 같았던 그날 경기는 결국 한화팀의 짜릿한 역전승으로 끝이 났다. 아버지는 "와~ 또 이겼다. 10연승이야, 10연승!" 하시며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아버지가 활짝 웃으시는 모습을 너무나 오랜만에 보았다. 그 모습에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아버지가 야구에게서 얼마나 큰 즐거움과 위안을 얻고 계시는지 새삼 크게 느껴졌다.
그 다음 경기에서도 또 그다음 경기에서도 한화팀은 계속해서 이겼고, 12연승을 달성하였다. 한화의 승리가 쌓여갈수록 아버지의 목소리에도 생기가 더해져 갔다. 하지만, 기록은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인 법, 하루를 쉬고 다시 시작된 이번 주 경기에서는 두 번을 연속해서 지는 바람에 아쉽게도 2위로 밀려났다(15일 기준).
아버지는 오늘도 야구중계를 기다리며 TV 앞에 앉아 계실 것이다. 부디 한화팀이 다시 힘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코리안시리즈에도 진출하고 올해 우승까지 차지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그리고 한화와 LG가 맞붙는 날에는 LG팬인 딸내미를 데리고 친정에 가야겠다. 그때 나는 어떤 팀을 응원해야 할까. 할아버지와 손녀가 티격태격하며 함께 경기를 보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친정 아버지는 요즘 한화 이글스의 야구 경기를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 심정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