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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비 오는 금요일 오후, 서울 경복궁역 근처 서촌 책방에서 독서 모임이 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반곱슬 머리에게는 외출하기 싫은 날이다. 애써 손질한 머리가 힘없이 가라앉고 구불거리면서 갈 길을 잃는다. 그럼에도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올 수 있는 건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망설이는 마음이 컸다.

서촌이라는 곳이 젊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고 독서 모임도 그럴 것 같았다. 세대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내 이야기와 그들의 이야기가 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첫 모임을 하고 나서 그건 괜한 기우였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을 소신 있게 말하는 좋은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혼자 읽었을 때보다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을 확장할 수 있었다. 함께 읽는 힘을 느꼈다.

이번 달 선정한 책은 르포 문학 작가로 활동하는 한승태의 <어떤 동사의 멸종>(2024년 6월 출간)이다. 전작 <퀴닝>, <고기로 태어나서>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그는 현장의 당사자가 되어 노동자들과 일상을 공유하며 직접 겪고 느낀 일들을 기록했다.

어떤 동사의 멸종 어떤 동사의 멸종-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
어떤 동사의 멸종어떤 동사의 멸종-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 ⓒ 예스24

이 책은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업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논픽션이다. 작가는 콜 센터, 물류 센터 상 하차, 뷔페 식당, 빌딩 청소 등 반복적이고 저임금의 노동 현장을 체험하며 그 현실을 기록한다. '전화받다','운반하다','요리하다','청소하다' 처럼 각각의 직업을 동사로 표현한다, 그 동사 옆에는 그 직업이 AI에 의해 대체될 확률이 함께 적혀있다.

그 일이 없으면, 일상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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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에서 공통으로 나온 반응은 이 직종들이 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삶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일들이 더는 당연하지 않을 때, 감당해야 할 불편은 생각보다 훨씬 클지도 모른다.

" 책방이 골목에 있어서 차가 들어오지 못해요. 청소하시는 분이 직접 수거해 가시죠. 그분이 못 오시면 골목이 엉망이 돼요."

몇 해 전, 추석 연휴에 길에 쓰레기가 넘쳐 나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매일 같이 거리와 건물을 청소해 주시는 분들이 없으면, 단 하루 만에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청소가 멈추면 건물은 금세 더러워지고, 거리의 풍경도 달라진다. 또 하루 배송에 익숙해진 우리가 택배가 늦어지면 어떻게 반응할까. 조용히 기다리기보다는 조급한 마음부터 앞설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일상은 사실 누군가의 반복되고 고된 노동 위에 놓여있다. 사회 시스템 유지를 위해, 이들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이다.

콜 센터의 고통은 시스템의 문제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일상은 사실 누군가의 반복되고 고된 노동 위에 놓여있다.(자료사진)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일상은 사실 누군가의 반복되고 고된 노동 위에 놓여있다.(자료사진) ⓒ gileres on Unsplash

작가가 가장 힘든 일로 분류한 것은 콜 센터 직원이었다. 독서 모임에서도 가장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특히 단기적으로 콜 센터 일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이 책을 읽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그 현장으로 돌아간 듯 당시의 스트레스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내게는 양돈장과 콜 센터를 비교하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전자가 항문으로 똥을 싸는 동물의 뒤처리를 하는 곳이라면,
후자는 입으로 똥 싸는 동물들의 뒤처리를 하는 곳이라 할만하다.

콜 센터 직원들의 노동 강도가 높은 이유는 단지 고객과의 갈등 때문만이 아니다. 업무 시간 내내 쉴 틈이 없이 전화를 받아야 하고, 고객이 요구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단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다. 적절한 시스템 없이 상담에 임한다는 건, 직원들을 그저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담사는 땜장이다. 융통성 없는 업무 프로세스와 엉성한 홈페이지 시스템의 틈새를 상담사의 사과로 덕지덕지 발라 메꾼다. 그래서 대대적인 수리 없이 그냥 저냥 굴러가게 만든다.

콜 센터에 전화를 걸면 흔히 이런 멘트를 듣게 된다.

"상담사는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폭언은 삼가 주세요."

그렇다면 기업은 어떤가. 상담사를 정말 소중한 누군가의 가족처럼 여기고, 그들을 고객 응대의 최전선에 세우는 걸까? 이 문제는 단순히 고객과 상담사 사이의 감정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회사가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추고, 상담사가 실제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그들도 자신의 업무에서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짜 고급 인력이란

독서 모임에서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자신의 일을 잘하는 사람이 고급 인력이라고 생각해요. "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흔히 학력이나 스펙이 좋은 사람을 고급 인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책임감 있게 일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고급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책에서 다룬 직업들은 대부분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일로 분류된다. 콜 센터 상담원과 물류 센터 상 하차 대체 확률은 각각 99%, 레스토랑 요리사 96%, 주방 보조와 빌딩 청소 일은 100% 대체 가능 직종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이 직업들이 대체 확률이 높다고는 하지만, 과연 AI가 이들의 모든 일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을까.

 AI가 이들의 모든 일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을까. (자료사진)
AI가 이들의 모든 일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을까. (자료사진) ⓒ hauntedeyes on Unsplash

<어떤 동사의 멸종>은 기술 발전 속에서 인간 노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AI 시대를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묵묵히 해내고 있는 그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 그 인식의 전환이 사회와 기업에 더 절실한 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어떤동사의멸종#사라지는직업들의비망록#한승태#노동에세이#노동의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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