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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락에서 비바람을 맞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빗방울은 중력이 아니라 바람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우산을 쓰고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흐려진 하늘이 넓어져도 시야는 좁아진다는 걸.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흔들리고 버티며 살아가는지를. '적당히'라는 것이 얼마나 허튼소린지를. 비바람, 하나도 버거운데 같이 오면 어쩌란 말인가.
늦잠을 잤다. 창밖은 어두운데 시간이 꽤 지났다. 커튼을 걷으니 빗방울 튕기는 땅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비가 그친다고 하지 않았나? 이럴 거면 시간대별 일기예보는 집어치우지 그래?" 아침부터 투덜거린다. 어제부터 내린 비가 이어지고 있다. 정원 일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늘 일기예보에 민감하다. 실망은 기대를 준 때문이다. 아무튼 번거로운 날씨다.
안 봤으면 몰라도 창밖에서 미친 듯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장화를 신고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선다. 비바람이 막아서지만 해야 할 일이다. 듣지 못한다고 해서 식물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궂은 날씨엔 식물들의 불편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떤 나무가 지지대를 원하는지, 어떤 풀이 물에 잠기는지, 어찌 보면 그동안 나의 소홀이 들통나는 순간이다.

▲비바람 속 뜨락아침 풍경, 홍가시나무와 꽃잔디, 아스파라거스와 샐릭스 ⓒ 김은상
홍가시나무는 거센 바람의 멱살잡이에 빨갛게 질렸다. 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좀 더 단단히 고정시킨다. 체구에 비해 가지 욕심이 많은 셀릭스도 풀어헤친 머리 아래에 지지대를 하나 더 대주었다. 비에 젖은 꽃잔디의 행색이 불그죽죽하다. 단풍은 물기 먹은 이파리를 부대끼며 아우성이고, 둥근 회양목과 향나무는 젤리처럼 낭창낭창 처신하고 있다. 외려 비쩍 마른 아스파라거스가 거센 바람 앞에 의연하다.
샤스타데이지와 모나르다는 한 몸으로 뭉쳐 바람에 맞선다. 파르르 떨고 있는 상사화는 바위 밑이라서 왠지 안전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높은 곳에서 건들거리는 몸집 좋은 소나무가 더 위태로워 보인다. 비바람에 쏟아진 철쭉과 죽단화 꽃잎이 바닥에 진득하다. 빗물은 새로운 생명을 북돋지만 소멸도 재촉한다. 산산이 부서진 붉은 모란은 '영랑'의 시구처럼 삼백예순 날로 돌아갔다.
강풍에 쓰러진 아치에 흰 등나무가 반쯤 누워 날 째려보고 있다. 두 손 잡아 일으키며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다독인다. 제철 맞아 얼굴 내민 계절 꽃들이 피자마자 물을 먹었다. 고개 숙인 꽃들의 턱을 받쳐 빗물을 털어낸다. 집게, 노끈, 벨크로 테이프, 그물망과 다양한 크기의 지지대의 도움을 받아 쓰러지고 늘어진 가지를 고정하는 동안 우산은 저만치 달아났다.
텃밭에 심은 참외 순이 녹아내렸다. 아쉽지만 여름 어느 날의 소소한 상상도 같이 사라졌다. 5월인데 아직 춥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은 더욱. 변덕스러운 기온 때문에 다른 작물도 성장이 시원찮아 걱정이다. 배수구를 막은 낙엽을 걷어내니 후련하게 물이 빠져나간다. 내가 할 일을 하면서 기후 변화를 탓하는 건지 돌이켜 본다.

▲비바람 속 뜨락바위 주변 상사화, 잎 진 모란, 텃밭, 영산홍 ⓒ 김은상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비에 젖은 내 몰골이 바깥의 풀꽃과 다르지 않다. 무얼 위해 이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내 안의 본능적인 돌봄 DNA가 발현된 걸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데, 사람끼리만 유대하라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아니, 나 자신의 욕망 때문일 수 있겠다. 삶이 무료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바쁜 척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집 바깥에 자연이 지천인데 굳이 공들여 정원이라는 걸 가꿀 이유가 뭔가? 남들보다 자연과 좀 더 가깝다고 무조건 좋다 할 순 없다. 자연이 그 자체로 바람직한 건지도 알 수 없고, 쇳덩이와 콘크리트가 자연과 어울리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자유로운 나를 찾아서 공간 이동했지만 관계가 곧 굴레인 건 아닐 뿐더러 다들 아름다운 구속을 노래하며 산다.
그래도 비바람 맞으며 꽃과 나무를 돌봐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쓰러진 꽃들을 일으키려 쭈그려 앉은 우산 속이 얼마나 안온한지를. 왜 이내 일어서지 못하고 미소 짓게 되는지를.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되는 기쁨을(어쩌면 환청일지라도). 왜 정원엔 비밀이 많이 쌓이는 건지 말이다.
바람은 저 먼 골짜기에서부터 파도를 타듯 나뭇잎 흔들며 밀려온다. 새들은 아랑곳없이 하늘을 비행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