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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폭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학폭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 jonasjacobsson on Unsplash

학교폭력(이하 학폭)만 보면 우리 교육의 현실이 보인다. 학폭 사안이 발생하고, 접수되고, 해결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이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학교마다 학폭 사안을 담당하는 학생부장 역할이 기피 업무 0순위인 이유이기도 하다.

학폭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학폭을 저지르는 연령이 나날이 낮아지고 흉포화하는 데다 근래 학폭을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여럿 개봉된 영향이다. 특히 재작년에 방송된 <더 글로리>는 교사와 학부모는 물론, 아이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학폭 설명회가 된 입시 설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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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고등학교의 입시 설명회도 '학폭 설명회'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양상이다. 예전 같으면 대입 전형과 내신 관리에 관한 내용 위주였지만, 요즘은 학폭이 대입에 미치는 영향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학교생활기록부(이하 생기부)의 학폭 기록 한 줄에 대입의 당락이 결정된다는 '엄포'로 시작된다.

"또래 친구들끼리 장난치다 다친 걸 두고 학폭이라고 할 수 있나요?"

학폭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면서, 과거에 흔히 듣던 이런 질문은 아예 사라졌다. 아이들 입에서조차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나온다. 학폭 사안인지 아닌지는 피해자가 규정한다는 뜻이다. 기실 물리적 폭력은 말할 것 없고, 욕설과 조롱조차도 얼마든지 학폭이 될 수 있다.

언뜻 바람직한 변화로 보이지만, 우리 교육의 적폐와 뒤엉키면서 온갖 부작용이 양산되고 있다. 학폭이 대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서열화한 학벌 구조 속에서 이보다 더 실효적인 대책은 없다지만, 부작용과 한계 또한 뚜렷하다.

뒤집어 보면,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대입에서 경쟁자를 밀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학폭만 한 게 없다. 대입 경쟁이 치열한 학교일수록 학폭 사안의 신고 건수가 더 많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물론, 개별 학폭의 '정도'와 신고 건수는 비례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전국 고등학교의 학폭 공시 자료를 통해 이러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학폭 심의 건수가 전년 대비 27.6%나 증가했는데, 특히 학교 유형별 증가율에 큰 차이를 보였다. 40.1%가 늘어난 일반고에 견줘 특목고와 자사고의 경우 무려 106.7%나 증가했다. 특성화고의 경우도 수재들이 진학한다는 마이스터고의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참고로, 심의 건수와 신고 건수는 다른 개념이다. 학폭 사안이 접수되면 교육청에 즉시 보고하고, 전담 조사관이 배정되어 학교를 방문해 가해, 피해 학생을 직접 조사하게 된다. 전담 조사관의 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학폭 전담 기구에서 교육청의 학폭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에 심의 요청 여부를 결정한다. 심의를 요청하지 않으면 사안을 학교에서 자체 종결한다.

심의를 요청하는 경우, 심의위에서 사안의 경중에 따라 징계의 내용이 결정되고 학교로 통보되어 해당 사항을 생기부에 기재한다. 결정 사항에 불복할 경우,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이때부턴 학교와 교육청이 일절 관여할 수 없다. '교육의 사법화'가 우려되는 지점이다.

심의위에서 사안이 미미하다고 판단되거나 학교에서 자체 종결 처리된 사안은 생기부에 기록이 남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피해자 중심주의'는 작동한다. 학폭 전담 조사관도, 학폭 전담 기구도, 이들의 조사 내용을 근거로 징계를 결정하는 심의위도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고작 이 정도 사안을 교육청 심의까지 올려야 하나요?"

심의 요청 여부를 결정하는 학폭 전담 기구의 회의에서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셋 중 한 명이 학부모인 그들 모두 피해자의 편에 서게 되지만, 지나치다 싶은 사안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전담 조사관의 조사 기록을 무시할 순 없다. 이후 자칫 책임 소재에 휘말릴 수 있어서다.

전직 학생부장과 경찰 출신이 다수인 전담 조사관의 입장도 난처하긴 매한가지다.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종결할 만한 사안으로 여겨져도 피해자가 심의를 요청하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실제로 SNS상에 적은 욕설 한 마디에 심의를 요청한 사례도 드물지 않다.

교사의 섣부른 중재는 금물이다. 학폭 사안 처리 절차에서 가장 강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안이 접수되면 48시간 이내 즉시 교육청에 보고하고 함부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적시하지 말며 양쪽에 합의를 유도하는 등 사안 무마를 위해 의심되는 행동을 금하는 건 철칙이다.

그러다 보니, 파블로프의 개처럼 학폭 말만 나오면 교육청에 보고하고, 웬만하면 심의를 요청하게 된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가장 뒤탈이 없다. 학교의 학폭 관련 업무를 줄여주기 위해 도입된 제도이지만, 교사의 손을 떠난 학폭은 '교육'은 사라지고 '서류'로만 남게 됐다.

'교육'은 사라지고 '서류'로만 남는 학폭

 학폭이 대입과 연동되면서 교육적 해결은 요원해졌다.
학폭이 대입과 연동되면서 교육적 해결은 요원해졌다. ⓒ sarah_elizabeth on Unsplash

"쌍방 폭행 아닌가요?"

학폭 사안이 접수될 때, 가해자와 학부모가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반응이다. 기실 학폭은 일방적인 경우가 드물다. 또한 지속적인 경우보다 우발적일 때가 훨씬 많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정적 용어 대신 '가해 관련자'와 '피해 관련자'로 부르고 기록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누가 봐도 피해자인데도, 괴롭힘을 순간 참지 못해 몸을 밀치거나 욕설을 내뱉었다고 쌍방 폭행으로 몰아가는 일도 빈번하다. 특히 가해자의 학부모가 '힘깨나 쓰는' 이라면, 피해자도 학교도 난처한 상황에 빠진다. 느닷없이 '학폭 전문 변호사'가 개입하기도 하는데, 순간 학폭이 자동차 사고처럼 과실 비율을 따지는 '숫자놀음'으로 희화화한다.

법률 지식이 부족한 학교에선 피하는 게 상책이다. 교사들이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고 교육적 화해를 도모할 여유가 없다. 일단 '학폭 전문 변호사'가 끼어들면 이때부턴 가해자와 피해자의 학부모들끼리 '승패'는 법이 결정한다. 학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관자'로 전락한다.

학폭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과 관련 시행령의 변화에 따라 학교에 하달되는 학폭 처리 지침이 조변석개한다. 그만큼 학폭 사안의 해결이 어려워졌음을 방증한다. 전문가들조차 학폭을 '아토피(원인을 알 수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에 비유하는 마당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내는 해결책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오랜 학생부장 경험으로 단언하건대, 학폭에 대한 '일벌백계'만큼이나 중요한 건 '개과천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대입 설명회 때 아이들과 학부모들 앞에서 학폭 처리 절차를 소개하고 "생기부에 기재되면 그걸로 끝"이라고 을러대는 내 모습이 솔직히 비참하다. 학폭은 교육적 해결이 불가하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아서다.

"선생님, 생기부에 기재가 되나요?"

학폭 사안을 전화로 알릴 때, 가해자 학부모든 피해자 학부모든 도중에 말을 끊으며 이렇게 질문한다. 얼마나 다쳤고 왜 다퉜는지 묻기에 앞서 자녀의 대입을 먼저 걱정하는 것이다. 학폭이 대입과 연동되면서 학폭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발생 빈도가 줄었을지는 몰라도 그만큼 교육적 해결은 요원해졌다.

교사들 사이에선 대입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냐는 자조마저 나온다. 고3의 학폭 신고 건수가 가장 낮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학벌 구조의 긍정적 효과'라고 입을 모은다. 학폭을 줄이려면 학벌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게 실효적이라는 '웃픈' 결론에 이르렀다. '교육의 사법화'를 막는 '교육적 해결책' 아니냐는 거다.

#학교폭력#교육의사법화#학폭대입반영#학폭전문변호사#학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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