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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5년간 영국에서 살고 있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애 낳고 살며 느낀 점이 '밤하늘의 별' 만큼 많다. 자녀들은 초중고대를 영국에서 나와 지금은 다 독립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무리 영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도, 나는 자주 한국이 그립다. 한국의 문화, 냄새, 심지어 소음까지도 그립다. 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갔다. 그런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번에는 영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문화, 풍경, 심지어 영국의 날씨까지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영국에 있을 땐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있을 땐 영국이 그립다. 어쩌면 나는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중국적자'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중감정자'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다. 삶이 힘들고 슬플 땐, 우리는 평화로운 천국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평화로운 천국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삶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자, 이제 그러면 내가 느끼는 장애인을 위한 한국과 영국사회에 대해 나누고 싶다.

 영국에서 '장애(disability)'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만든 장벽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영국에서 '장애(disability)'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만든 장벽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 jontyson on Unsplash

아무도 장애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영국의 장애인은 주당 약 180파운드(한 달 약 120만 원)를 정부에서 지급받는다. 그리고 장애 정도에 따라 차량제공, 무료 자동차 정비, 무료 주차 배지 등 다양한 혜택도 제공해 준다. 그 외에도 장애정도에 따라 정부에서 운전 가능한 파트타임 또는 24시간 풀타임 요양보호사를 무료로 제공해 준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동네에서 산책이나 쇼핑 또는 카페를 가면 장애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들이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면 양보해 주는 시민들이 많다. 아니면 아예 새로운 계산대를 열어주는 친절한 슈퍼마켓 직원들도 많다.

장애인 사회복지 혜택에 대해 영국인들은 조세저항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유는 '아무도 장애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니까' 또는 '내 아들이나 딸이 장애인으로 태어났거나, 교통사고로 내가 곧 장애인이 될 수 있으니까' 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

35년 전 영국에 처음 와서 받은 '문화충격' 중의 하나는 대화를 하다가 자녀나 형제 중에 장애인이 있는 것을 아무 꺼리김이 없이 내게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체면을 차리지 않고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문화라고 할까?

한편, 한국의 장애인 연금은 월 30만 원대다. 서울에서 이걸로 생활하려면, 휠체어로 북한산을 오르라는 수준이다. 물론 정부에서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은 여전히 만능카드처럼 쓰인다.

장애우? 장애인? 용어 하나에도 담긴 인식의 차이

한국에서는 '장애인'과 '장애우(障碍友)'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계속된다. '장애우'는 '장애를 가진 우리의 친구'라는 따뜻한 뜻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온정주의적 시선이 담겼다는 비판도 있다. 반면 '장애인'이라는 표현은 객관적이지만 때때로 거리감이 느껴진다.

영국에서는 'disabled person'을 주로 사용한다. '장애(disability)'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만든 장벽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한 영국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의해 장애인이(disabled)된 거야." 우리말로 바꾸자면, "내가 불편한 게 아니라, 네가 나를 불편하게 만든 거야"라는 뉘앙스다.

한국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영국에는 '평등법(Equality Act)'이 있다. 둘 다 차별을 금지하고,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법은 선진국, 현실은 개발도상국이라는 말이 여전히 통한다. 영국은 지난 1995년부터 장애인 차별을 법으로 금지했고, 한국은 2008년에야 시작했다.

한국은 특수학교 중심 교육, 영국은 통합교육 중심이다. 영국에서는 장애학생의 절반 이상이 일반학교에 다닌다. 한국은 그 비율이 훨씬 낮다.

장애인 고용은 한국은 "안 뽑으면 벌금!"이라는 의무고용제다. 반면 영국은 "뽑으면 지원금!"이라는 인센티브제다. 채찍과 당근의 차이다. 결국 마음가짐의 차이가 아닐까.

언론 속 장애인 표현

한국 방송에서 장애인은 대개 '감동의 주인공'이다. 휠체어 타고 등산, '장애 극복' 수상소감, '감동의 눈물' 자막은 단골이다.

반면 영국에서는 휠체어 탄 청년이 데이팅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무편집, 무자막, 무감동. 시청자는 웃고 넘긴다. 장애는 콘텐츠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장애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함께 사는 것"이라 정리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우리'를 좋아한다. 정겹지만 때때로 족쇄가 된다. "우리 불쌍한 장애우들…" 하는 연민어린 시선은 따뜻해 보이지만, 동시에 주체성을 앗아간다.

반면 영국은 장애인 '보호' 보다 '인권 보장'을 말한다. 장애인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권리를 가진 일반인과 똑같은 주체라고 본다. 길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을 봐도 특별한 시선을 주지 않는다. 마치 옆집에 사는 사람처럼.

장애는 불편이 아니라 불평등

서울역에서 휠체어 탄 시민이 "엘리베이터 어디 있죠?"라고 물으면, 복잡한 동선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시위라도 벌이면 뉴스 제목은 "출근길 시민 불편 초래"로 나온다.

런던 지하철은 이미 2000년대 초부터 접근성을 기준으로 리모델링됐다. 역사 3곳 중 1곳 이상은 장애인이 '스스로' 이동 가능하다. 24시간 핫라인도 있다. 자동응답 대신 사람 목소리가 반긴다.

장애인이 서울에서 지하철의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는 007작전을 능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운 좋으면 지하 1층에서 곧장 지상으로 직행하지만, 운 나쁘면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시 돌아가'는 모험이 기다린다. 목적지는 서울역인데, 여정은 거의 남산 등반이다.

런던에서는 어떨까? 휠체어를 탄 승객이 등장하면 지하철 직원이 즉시 와서 도움을 준다. 대중교통시설에 대한 접근성은 서비스의 기본, 태도는 권리의 존중이다.

한국은 제도를 빠르게 바꾸는 능력이 있다. 영국은 오랜 역사의 권리의식이 있다. 어느 한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진정한 장애인 친화사회란, 장애에 대해 특별한 배려가 필요 없는 사회다. 마치 왼손잡이를 위한 특별법이 필요 없듯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 서울역에서 휠체어를 탄 시민이 "엘리베이터 어디 있죠?" 대신 "어떤 노선이 제일 빠를까요?"라고 묻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

"장애는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영국 옥스퍼드대 사회학 책에 나오는 말이다. 그 말이 어느 날, 서울 지하철에서도 울려 퍼지길 바란다.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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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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