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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와 그의 동지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마치 '백마 탄 초인들'로 상상하고 있었다. 기대와 이상이 조합된 형상이었다. 중경 임시정부의 각 정당과 단체는 경쟁적으로 신참 광복군들을 초청하여 환영회를 베풀겠다고 하고, 정부 각원들의 교양강좌를 듣게 되면 자당의 선전이거나 다른 정파에 대한 비난이 적지 않았다.

이같은 임정의 파쟁과 분열상을 지켜보면서 차츰 실망의 싹이 터올랐다. 정파 인사들 중에는 청년들의 개별 포섭공작을 하는 등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후 정당의 초청환영회에는 일체 나가지 않기로 결정을 보았다. 당시 중경에는 350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 임시정부 내무부 주관으로 매월 1회씩 교포들을 모아 정세를 보고하고 단합대회를 열었다.

장준하 일행은 임시정부에 도착한 지 2주일 쯤 되어 한인회의 초청을 받았다. 전국무위원과 100여 명의 교포가 참석하여 국내소식을 듣는 자리였다. 장준하가 대표로 국내실정을 보고하기로 했다. 장준하는 일제의 폭정에 시달리는 조국의 실상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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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동안 지켜 본 임시정부의 문제점을 국무위원과 교포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고발하기로 작정했다. 국내정세의 보고로 분위기가 숙연·처연해지자, 임시정부 내부의 문제점을 차분하게 제기했다.

요즘 우리는 이곳을 하루빨리 떠나자고 말하고 있다. 나도 떠나고 싶다. 오히려 오지 않고 여러분을 계속 존경할 수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지 모를 일이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다. 일군에 가면 항공대에 들어가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 받은 설움을 다 잊으셨는가, 그 설욕의 뜻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분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이용물이 되고자 이를 악물고 헤매여 온 것은 아니다.

가히 폭탄선언이었다. 새파란 청년이 백전노장들 앞에서 다시 일군에 들어가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고 한 발언은, 감히 누구라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말이었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혼돈에 빠져들었다. 교포들이 웅성거렸다. 잔치는 파장이 되고, 이 발언으로 긴급 국무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얼마 뒤 신익희 내무부장이 장준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장준하는 국무회의실로 불려갔다. 그것은 기다리던 참이었다. 김구 주석이 장준하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장준하는 흥분하지 않고 그동안 보고 느낀 점을 찬찬히 설명했다.

10여 일 동안 우리들 눈에 비친 임정은 결코 우리가 사모하던 임정과 다른 것임을 알게되었다. 잘못 본 것이라면 용서를 바란다. 처음 탈출해서 긴 행군을 하면서 임정은 모두 일치단결된 힘으로 잃은 나라 찾는 데만 목숨바쳐 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환상이 아니었나 회의를 품게 되었다. 저희가 잘못 본 것인가?

광복의 날이 와서 귀국하게 되면 그 때도 임정의 타성이 옮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임정이 왜 필요한가? 진정 나라사랑의 일념이라면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는 이 실정은 무엇인가? 그래도 임정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뜻에서 한 발언에 벌을 주면 달게 받겠다.

다시 한번 폭탄선언이었다. 이후 임정에서는 장준하 등 학병출신들을 '무서운 젊은이들'로 통하게 되어 함부로 대하거나 만만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임정의 분열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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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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