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과 감격으로 마음이 설래 일 때 이날 저녁 환영회가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다는 전갈이 왔다. 이에 앞서 대원들은 인근 목욕탕으로 안내되어 여러 달 동안의 묵은 때를 씻고 광복군의 새 군복이 지급되어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된 것이다.
탈출학병을 대표해 장준하가 답사에 나섰다.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하며 소회를 밝혔다.
저희들은 왜놈 통치 아래서 태어났고 교육을 받고 자라 우리나라 국기조차 본 일이 없었다. 어려서 일장기를 보았지만 무심하였고, 철이 들면서 저것은 일본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가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고, 그때부터 모든 것은 의혹의 대상이 되었고 저희를 괴롭혔다.
우리나라의 국기를 보고 싶었다. 일군에 끌려나오게 되고 고국에 남긴 가족이 폭정에 시달릴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들 자신을 다시 생각해 왔다. 누구를 위해 이 고생을 하며 왜 왜놈상관에게 경례를 붙여야 하는지, 분노가 용암으로 화산구를 찾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임정 청사에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고 울음을 삼켜가며 눌렀던 감격, 그것 때문에 6천리를 걸어왔다.
그 태극기에 아무리 경례를 하여도 손이 내려지지를 않고 영원히 계속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토록 고귀한 것인가를 지금도 생각한다. 아까 총사령관께서 사열을 받으실 때, 아! 우리도 우리의 상관 앞에 참다운 사열을 받는구나, 꿈만 같았다. 주석 선생님 앞에 설 때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진정한 조국의 이미지와 우리 지휘관과 우리가 몸바칠 곳을 찾았다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이제, 저희들은 아무 여한이 없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선배들의 노고에 다소나마 보답이 된다면 무엇이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하라는 대로 할 각오이다.
장준하의 격정적인 답사가 이어지면서 김 주석과 각료들이 소리 없이 울고 있다가 마침내 주석의 '흑!'하고 지금까지 참았던 울음의 폭발을 계기로 장내는 울음바다로 변해버렸다. 장준하도 이 울음의 물결에 답사의 끝을 맺지 못한 채 그냥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눈물바다는 처절한 통곡이 되어 마치 초상집처럼 흘러 넘쳤다.
음식이 들어왔지만 누구 한 사람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김 주석이, 너무 지쳤을 테니 다들 돌아가 쉬자면서 먼저 일어서고, 모두들 따라서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임시정부에서의 첫날이 이렇게 저물었다.
이튿날부터 임시정부 청사에서 생활이 시작되었다. 꿈만 같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꿈만 같았다. 날이 밝자 누군가 종을 쳤다. 아침 식사 시간을 알리는 타종이었다. 여기저기서 임정 요인들이 걸어 나왔다. 중경시내에 가족이 있는 사람은 예외지만 50여 명의 요인과 직원들이 청사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이제 식구가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중경시내 연화지(蓮花池)에 자리한 이 청사는 장준하 일행이 도착하기 4개월 전에 월세로 얻은 건물이다.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그나마 상해 시대에 이어 청사다운 청사를 갖게 되었다. 요인들은 청사의 흙방에 침대 하나씩을 놓고 지내고 있었다.
이튿날 오후 광복군총사령부에서 초청 환영회가 열렸다. 청사에서 꽤 떨어진 곳에 광복군사령부가 있었고, 준비된 음식도 어제와는 달리 비교적 여유 있게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환영만찬장은 금새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분위기가 감격과 감동에 휩쌓이면서 말할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올라 선후배 동지들은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 껴안고 통곡하였다.
장준하와 동지들은 며칠이 지나면서 임시정부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임정은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청년당, 천도교, 무소속까지 7개 정파의 연립정부 성격으로 구성되었다. "셋집을 얻어 정부청사를 쓰고 있는 형편에 그 파는 의자보다도 많았다."라는 지적이 있을만큼 당시 임정의 구조는 '정파연립'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