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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경 임시정부
중경 임시정부 ⓒ 이승숙

승선한 지 8일째 되는 날 오후 3시경, 배는 중경 시내를 바라 볼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아아, 중경이 보인다."

장준하와 동지들은 서로 얼싸안고 감격을 나누었다. 꼭 횡단 출발한지 7개월 만에 목적지가 지금 조금씩 뚜렷하게 일행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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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마음 속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그런데 입 밖으로 새어나왔던 모양이다. 곁에 있던 동지 한 사람이 나직이 입속으로 따라 불렀다.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신념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생명의 원천이란 것을, 장준하는 체험을 통해 확신했다. 이 때의 신념은 앞으로 계속 자신을 지배하고, 또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를 지배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내가 사랑하는 내 조국도 이 신념을 필요로 할 것이라 마음 깊이 다지고 다졌다.

"혹시 저것이…."

장준하는 멀리 건물 위에서 휘날리는 것 같은 깃발을 보았다. 심장이 뛰었다. 혈관이 졸아지는 듯 했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걸음을 재촉해서 다가갔다. 그러나 그것은 5층 건물이 아니고 층암 위에 차례로 지어 올린 단층건물이 겉모양으로는 웅장한 5층 건물로 보인 것이다.

그러나 깃발은 분명 태극기였다.
장준하는 그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듯이 굳어졌다. 몇몇 동지들은 태극기를 향해서 엄숙히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육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임시정부 건물 위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점점 확대되어 보였다. 휘날리는 깃폭마다 자신의 뜨거운 숨결이 휩싸여 안기는 듯 하였다. 그리고 어느새 태극기의 깃폭은 임시정부 청사가 아닌 조국 3천리 강토를 뒤덮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는 윤봉길의거 이후 일제 경찰의 습격으로 이곳을 떠나야 했다.
요인들은 대부분 피신했다. 피신한 요인들은 항저우를 거쳐 전장으로, 전장에서 다시 창사로, 창사에서 광저우·류저우로 피난했다가 다시 치장을 거쳐 충칭(중경)에 자리 잡았다.

임시정부가 치장에서 중경으로 옮긴 것은 1940년 9월이다. 상해에서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8년 여의 대장정이었다. 임시정부 청사 게양대에는 태극기만 걸렸으나 응접실 벽에는 태극기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중국국기가, 다른 쪽에는 프랑스 국기가 걸렸다. 프랑스 국기는 당시 프랑스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데 대한 답례였다고 한다.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광복군을 창설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카이로 선언을 이끌어 낸 외교활동,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하는 등 많은 일을 하고, 8.15해방을 맞았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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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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