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은 어느새 강군이 되어 가있었다. 애국심이 행군의 활력소로 작동한 것이다. 이종인 부대에서 보급품과 식량, 그리고 상당액수의 노자가 나왔다. 연극공연이 크게 효과를 본 것이다.
25일 간의 노하구 체류를 끝내고 일행은 파촉령 고갯길을 넘기 위하여 다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노하구에서 중경으로 가는 길은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는 한 파촉령을 넘는 길 밖에 도리가 없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중경으로 밀려간 후 비로소 생긴 이 통로는 그 후 계속 전후방을 연결하는 유일한 전경로(傳經路)가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장비와 병참 지원보급을 국민정부는 사람의 등짐으로 져서 이 파촉령을 넘어 보내곤 하였다. 그 대신 일본군의 기동대는 도저히 이 파촉령을 넘을 수가 없었다. 일군의 기동력은 말과 자동차였다. 포대에서 대포를 끄는 말과, 보급 지원과 수송을 담당하는 자동차가 주로 점과 선을 점령 확보하는 전략에 쓰였다. 이 파촉령에서는 오히려 기동력이 무력한 것이 되었다.
엿새 째 되는 날 파촉령 고원지대를 향해 걷고 있을 때 난데없이 거대한 호랑이가 앞장 선 장준하와 김준엽의 머리 위로 휙 날라서 네 댓 발자국 앞에서 내려 앉았다. 혼비백산, 하마터면 호랑이 밥이 될 뻔했다.
일행의 행군을 동장군 못지않게 괴롭힌 것은 이였다. 혹독한 추위에 사지가 얼어가는 데도 몸 안에서는 이가 득실거렸다. 대원들은 견디다 못해 쭈구리고 앉아 쉴 때면 옷을 벗어 뒤집어 털었다. 보리알 같은 이가 눈바닥에 떨어져 바둥대다가 얼어 죽었다.
고원지대를 다 횡단하기 전에 날이 저물었다. 한 자 높이의 눈이 쌓인 고원, 그야말로 일모도원(日暮途遠) -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 데, 일행은 너무 지쳐 있었다.
이 눈 위에, 어디 한 곳 몸둘 곳 없는 이 고원위에서 일행은 밤을 지새야만 했다.
그것은 가혹한 형벌이었다. 눈베개를 베고 자는 일행은 고행자였다. 그러나 이 파촉령 너머의 고원에서, 한 밤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지도 하늘의 뜻에 맡길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둠이 깔리기 전 나뭇가지를 꺾어다 움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그 위에 솔가지를 깔고 쭈그리고 앉아 보았다.
메마른 눈물이 괴었다간 얼어서 눈시울이 시렸다. 바람만, 그 매섭고 칼날 같은 바람만 아니라면, 그래도 체온과 체온을 맞대고 이밤을 지세련만….
장준하는 간절히 기도했다.
"아, 나의 조국이 주는 이 형벌의 죄목은 무엇인가? 밤 하늘에 별 따기가 돋아나 우리를 보호해 주소서."
밤 두어 점이나 되었을까.
내 몸의 3분의 2 이상이 이미 내 몸이 아닌 동태였다. 나의 의식은 분명히 내 체구의 3분의 1 부분 안에서만 작용하는 것 같았다.
피의 순환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기도 했고 점점 늦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먼 먼 산짐승 소리가 울려왔다. 그 무서운 메아리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헤치고 우리들이 웅크린 설원 위에까지 스며왔다.
책상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던 구두발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보라가 치지 않는 것만 해도 크나큰 다행이었다. 만약 눈보라가 쳤다면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다시 소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절대자의 보호가 우리를 굽어보는 것 같아 우리는 이 추위를 이길 용기와 각오를 새로이 했다.(장준하, 앞의 책)
날이 밝았다. 모두들 살아 있었다. 죽지 않고 중경으로 가야한다는 신념과 용기가 혹독한 설원의 긴긴 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해가 높이 떠서야 일행은 고원지대의 횡단에서 주막을 찾아내었다. 이런 곳에도 주막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여기서 두부탕을 사먹고 지친 몸을 쉰 다음 다시 길을 재촉했다.
노하구를 떠난 지 14일 만에 파촉령을 완전히 벗어나 양자강 지류의 평지에 이르렀다. 이제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중경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1945년 1월 20일, 6,000리의 장정을 끝마치고 파동(巴東)에 도착한 일행 중 일부는 계속 보행을 하기로 하고, 장준하 등은 중국군 군용선을 타기로 했다. 노자를 탕진해버린 몇 사람은 선비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