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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동짓달 하순, 장준하와 장정 행렬은 혹한의 대륙을 걷고 또 걸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낀 행렬은 더디고 초라하였지만 사기는 대단히 높았다.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길이라 추운 날씨에도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출발 당일은 낮에 40리 길을 걸어야 하고 밤에는 다시 70리를 더 가야 평한선(平漢線, 북평에서 평한구까지의 철도)을 횡단, 다시 80리를 행군해야 안전지대에 도착하게 된다. 후방으로 이동하는 중국 중앙군 1개 사단의 병력과 합류하여 따라가는 길이라 뒤쳐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난 3개월 간 쉬었던 발걸음이고, 아이들과 여자들의 보행에 맞추다 보면 느리고 쉽게 지쳤다. 평한선 철도는 일군의 보급을 위한 생명선이어서 일군으로서는 전략상 가장 중요한 철도였다. 곳곳에 일군이 배치되어 있어서 이것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장준하가 중국 중앙군과 함께 보행하면서 놀라운 일은 그들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군대라기보다는 마치 퇴각하는 패잔병 부대와 같았다. 중앙군 1개 사단병력이 평한선을 넘고자 하는 행렬을 지켜보면서, 장준하는 일군과 묵계 또는 양해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대가 일군지역 철도를 횡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양측 사이에는 피차의 이익을 위해 가끔 이 같은 묵계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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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가 또 놀라운 사실은 중앙군의 기막힌 가마행렬이었다. 이동행렬 속에는 50여 대의 가마가 있었고 남루한 군복의 중국 군인이 메고 가는 가마에는 사단장의 가족이 타고 있다는 것이다. 5억이 넘는 인구의 중국이 수십만 명 일군에게 쫓기게 되는 현실은, 이 같은 중국군 지도부의 부패·타락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 중앙군에는 우수한 부대도 적지 않았지만, 이 같은 엉망인 부대도 많았다. 장준하는 개탄했다.

후방도 아닌 전방지대에 사단장이라는 지휘관은 수 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다니고, 박격포를 메고가야 할 그 어깨엔 그 대신 지휘관의 처첩들의 가마가 올라 앉는가 하면, 정규군의 모습이 아닌, 이 미련한 중국군, 일군에게 밀리면서 또 홍군과 맞붙어 싸우며 떠다니는 유랑의 군대, 그런가 하면 일군은 '점과 선'만을 차지하고, 타협도 해가면서 대륙을 들쑤셔 놓은 그 약삭빠른 허세의 군대였다.

밤이 깊어지면서 기온은 급강하하고 찬 바람이 뺨을 할퀴었다. 어린아이를 업고 걷는 사람들은 안간힘을 다해 걷고 있었다. 낙오되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두들 사력을 다하여 걸었다. 걸으면서 음식을 먹고 발이 시리면 주저앉아 서로 주물러 주면서 걸었다.

일인당 밀가루 서너 되씩의 양식이 수레에 실리고 또 자루에 담겨 어깨에 메었다. 각자는 얼마간의 용돈을 나누어 가졌으며 긴급용으로 콩기름에 부친 밀가루떡, 밀개떡을 조금씩 꾸러 넣은 행장을 가졌을 뿐이었다. 동복도 아닌, 청색 중국군 여름 군복으로, 찬바람 속을 뚫고, 줄을 이었다.

장준하는 걸으면서 자신에게 물었다.

"왜 이래야 하는가?"

그리고 스스로 답했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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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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