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경기도 안산의 한 카페에서 문하연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주영
작가의 친한 동생은 어느 날 정신과를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불안이 커져서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대기실이 꽉 찰 정도로 환자가 바글바글했다. 의사는 '계엄 발표 이후로 환자가 3배 폭증했다'며 당신만의 일이 아니라고 동생에게 위로를 건넸다.
장편소설 <소풍을 빌려드립니다>를 낸 문하연 작가는 1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위의 일화를 소개하며 "그만큼 계엄 이후로 전 국민의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내란 사태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지만, 그가 난생처음 소설이란 걸 쓰게 된 이유도 마음이 힘든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3년 전, 오랜 친구가 했던 말이 불을 지폈다.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도 아픔을 치유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줘.'
당시 문 작가의 마음도 회의감으로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전업주부로만 살다가 글쓰기 교실에서 쓴 에세이를 2017년 <오마이뉴스>에 보낸 게 계기가 돼 엉겁결에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때가 47살이었다. 늦은 도전이었지만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듯했다. 중년 여성의 삶에 대해 격주 연재하던 글들이 쌓여 생애 첫 산문집인 <명랑한 중년_웃긴데 왜 찡하지?>를 냈다. 살림하며 틈틈이 미술과 클래식 공부를 했던 경험을 발판 삼아 <다락방 미술관>과 <다락방 클래식> 등의 예술서적도 출간했다.
쓸수록 꿈이 생겼다.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어 최고령의 나이로 드라마 작가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운 좋게 유명 PD에게 발탁되고 공모전에도 당선돼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제안을 받아 오페라 극본도 한 편 냈다.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일이 꼬였다.
"유명 드라마 PD님과 둘이서 작품 개발을 꽤 오래 했는데 잘 안 됐다. 또 이 악물고 열심히 써서 공모전에 당선돼 제작사에 들어갔는데, 많은 사람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글이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어졌다. 사이코패스가 나타나서 사람 죽이는 그런 거 말고,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 말이다. 뭐가 있을까 생각하는데 그때 친구가 한 말이 떠오른 거다."
친구는 신경질환자가 연루된 사건사고 기사가 나올 때면 괴로워 숨을 못쉬겠다고 털어놓곤 했다. 그에겐 신경질환이 있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문 작가는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 그들과 살아가는 가족들이 죄인처럼 위축돼 살아가지 않으려면, 함께 잘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어떤 사람의 삶에 대해 책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작품을 통해서라도 알게 되면 사회가 조금 조심하게 되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누구에게나 꽃길은 있다, 뒤돌아 볼 수만 있다면
<소풍을 빌려드립니다>는 마음의 상처와 아픈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복합문화공간 '소풍'에서 교류하며 함께 아물고 성장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40대 여성 '연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심정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춘하시로 무작정 도망쳐 왔다. 가진 재산을 다 털어 호숫가 2층 펜션을 사들인 뒤 '소풍'을 열었다.
더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기 싫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가려 했는데, 20대 남성 아르바이트생인 '현'을 시작으로 새로운 이웃들의 삶에 얼키고 설키면서 연재 역시 나름의 출구를 찾게 된다. 말 못할 비밀을 품고 있는 현도 연재의 돌봄과 신뢰에 힘을 얻어 다시 세상으로 용기 내 나아간다. 이밖에 '소풍'에 모인 다른 사람들 역시 바느질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고 요가를 하고 전시회를 여는 과정에서 세상과 사이좋게 사는 법을 익혀간다.
문 작가는 272쪽 분량의 소설 초고를 "무언가에 홀린 듯 몇 달 만에" 완성했다. 물 흐르듯 썼지만 몇몇 인물의 매력이나 소설의 메시지는 제대로 전달하려 나름 신경 썼다. 제일 공을 들인 인물은 아픔을 지닌 현이다.
그는 "독자들이 현이를 응원하게 만들고 싶었다. '얘가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캐릭터이길 원했다"라며 "현이 느낀 고통과 아픔을 독자들이 안다면, 일상이나 일터에서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도 충분히 응원하고 품어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가 현과 같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잘 품어줘야 그들이 힘을 받아 더 살아나갈 수 있다. 공동체가 배제하면 이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라고 덧붙였다.
"우리는 사람에게 상처받지만 결국은 답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나. 저도 뼈저리게 느낀다. 작업하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지만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치유받는다. '내가 해답을 가진 사람 되려면 어떻게 인간을 바라봐야 하는가.' 소설을 쓰며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나의 아픔을 치유해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보다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고 친절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스스로 품으려 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면, 저절로 자신의 상처도 객관적으로 돌아보며 치유될 수 있다는 게 문 작가의 믿음이다. 자기 고통에만 매몰되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 같은데, 타인에게 시선을 돌리고 관심을 쏟으면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며 수렁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
소설에서 연재가 혼자 '소풍'에 들어와 불을 켜고 꽃 그림들이 나란히 전시된 공간을 둘러보는 장면에도 이런 의미를 담았다. 그가 작품을 빚어내며 제일 마음에 들었던 대목이기도 하다.
사방은 춥고 고요한데 액자 속 꽃들은 알록달록 만발해 있다. (...)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쇼팽의 녹턴을 재생시켰다. 녹턴과 꽃 작품의 밤하늘에 은하수처럼 찰떡이었다.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로 녹턴을 들으며 디귿 모양 꽃길을 걸었다. 종점에 도착하면 뒤돌아 다시 걷고, 또 종점이면 뒤돌고... 뒤돌기만 하면 끝도 없는 꽃길이었다. - <소풍을 빌려드립니다> 147~150쪽
문 작가는 "뒤돌기만 하면 다른 상황이 될 수 있는데 뒤돌지 못한다. 계속 빠져 있다. 소설 속 연재도 전시장에선 '뒤돌면 꽃길이 펼쳐 있다'며 좋아하지만 자기 현실의 고통 앞에선 선뜻 뒤돌지 못한다"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말하면 뒤돌아서서 고개를 들고 시선을 바꾸면 나만의 꽃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어디로 뒤도느냐는 저마다의 선택이다. 문 작가가 '드라마 작가'라는 꿈이 이뤄지지 않아 괴로울 때, 소설이라는 방향으로 뒤돌아 서서 '소설가'라는 수식어를 새롭게 얻게 된 것처럼.
"상처에 안녕을 고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

▲소설 <소풍을 빌려드립니다> 앞표지 ⓒ 이주영
호기롭게 소설을 덜컥 냈지만 정작 그는 아직 책을 펼쳐 보지도 못했다. "긴장되고 부끄러워서"다. 소설 창작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이 완성한 작품이어서, 어디선가 '네가 감히 소설을 써?' 하며 비웃을 것만 같은 자격지심이 든다고.
돌아보면 문 작가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모두 '처음'이다. 첫 에세이, 첫 예술서적, 첫 오페라 극본, 그리고 첫 장편소설. 한 분야만 파도 모자랄 시간인데 어쩌다 보니 글의 장르가 계속 바뀌었다. 매번 처음이라 '햇병아리'가 된 두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계속 쓰다 보니 적어도 기회가 끊기진 않는다.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
미술관으로 간 명랑한 중년'이 올 가을 출간을 앞두고 있고, 피해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두 번째 소설 초고도 완성해 뒀다. 최근엔 영화 시나리오 제안이 들어와 또 다시 미지의 세계에 도전 중이다.
"저는 어떤 장르의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계속해서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그게 제 동력이에요. 좋고, 따뜻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울고 웃다 보면 책은 끝나지만 생각을 곱씹게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문 작가는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우리 모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해 힘든 마음에 여유를 찾았으면 좋겠다. 친절한 미소 하나로도 마음이 포근해지니까. 나부터 친절해지겠다"라고 했다. 이어 "자기 상처로부터 안녕을 고하고 싶은 사람, 마음의 짐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 관계를 맺어야 할지 끊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 책을 봤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