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나가게 된 교회의 깃발을 흔드는 묵음. 대전은 집회가 끝난 후 노래 세 곡을 함께 즐기는 뒷풀이를 한다. ⓒ 묵음
"광장은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같아요. 먹는 순간 눈에 안 보이던 투쟁장이 보이고, 안 들리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서 투쟁을 나갈 수밖에 없어요. 이건 숙명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묵음(만 28세, 데미걸, 산재청구인, 대전 유성구)은 기독교인이면서 퀴어다. 두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게 되면서 그는 양분되었고 통합하기 위해 애쓰다가 20대가 지나갔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힘든 환경은 그를 묵음, 소리 나지 않는 상태로 살게 만들었다.
재작년에 어머니가 실직하면서, 그는 다니던 대학원을 휴학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는 어디에도 없었고, 알바지만 3년 동안 매니저급 업무총괄을 해온 경력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3개월짜리 인턴 직을 잠시 하고, 반년 만에 겨우 구한 직장에서 그는 사내 괴롭힘을 당했다. 생활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지내던 중 어느 날 아침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휴직계를 내고 산재를 신청했다. 공단에서는 특별진찰 대상자에 해당되니 지정병원에서 특진을 받으라고 했다. 대기자가 많아 최소 7-8개월 기다려야 하는 병원이었다. 회사는 그를 질병퇴사가 아닌 계약만료로 처리해 버렸다.
내란이 일어나던 밤에도 그는 '재해경위서'를 쓰느라 계엄 소식을 듣고도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뉴스와 sns를 통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진 것인지 차차 깨달았다. 그는 꼬박 한 달에 걸쳐 재해경위서를 쓰는 와중에도 남태령집회 라이브를 챙겨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났다. 그건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고, 공권력의 탄압은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는 당장 SNS에 도움을 청했다. 남태령에 가야 하니 교통비 등을 후원해 달라고. 그의 친구들은 교통비와 기프티콘 등을 기꺼이 보내주며 일 때문에 가지 못하는 자기 대신 싸워달라고 했다. 그는 서울에서 친구 집을 전전하며 일주일간 집회에 나갔다.
"인간이 그렇게 대우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날 남태령의 상황을 알려주신 모든 분들에게 정말 감사해요."
성소수자로서 그는 이전 집회에서는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박근혜 탄핵 때나 이명박 정권 당시에는 대중집회에서도 노조원에게도 조끼를 벗으라고 요구하거나 프라이드 플래그를 들고 간 사람들을 밀어내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 자신을 드러내면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근데 남태령에서는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 것 같다고 느껴졌어요."
남태령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퀴어, 당원, 개인, 장년층, 응원봉, 가족 단위 등등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농민을 응원하고 서로를 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묵음도 자연스럽게 그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느껴졌다. 누가 뭐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었다.
"그 추운 날씨에 서로가 서로를 챙기고 돌보는 분위기 속에서 내가 누구여도 도움을 주었겠구나 하는 신뢰가 생겼어요. 그런 신뢰가 쌓이면 내적으로 고양되면서 순간적으로 어떤 임계점을 넘는 것 같아요.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바로 이런 것이길 바랐어요. 구태여 용기를 내야 할 필요 없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자리, 그런 신뢰가 광장에서부터 시작된 게 기뻐요."
서울집회를 다녀와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은하수네거리로 나왔다.
"'코웨이 코디'노동자의 발언이 기억에 남아요. 회사가 노동자들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자사 상조회사의 상조판매원으로 등록시켰대요. 지역 사업장에서 이런 시위가 있는 줄 전혀 몰랐어요. 현직교사가 AI 디지털 교과서의 문제를 말한 것도 인상 깊었어요. 막연히 예산낭비라고만 생각했는데 학습 면에서도 문제가 심각하더군요."
직업인들의 발언은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반대의 언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는 대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또래뿐 아니라 교수님, 목사님,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투쟁해 왔는지 가까이서 보고, 우리가 어디에 연대하고 어떻게 투쟁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돈이 없는 그에게 동지들은 밥을 사주었다!

▲묵음의 2차 창작물들과 태섭인형 ⓒ 조용미
대전집회는 지역사회라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계속 평등수칙을 주지 시켜도 여전히 지키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집회 주최 측이 계속해서 노력해 주었고, 덕분에 별일 없이 광장을 열 수 있었다. 역시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연대의 장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피땀 흘려 노력해야만 가능했다. 그는 앞으로 지역을 바꿔가는 일에 힘을 보탤 생각이다.
"광장이 일상으로 이어지게 해야죠. 그렇게 되기를 막연히 기대하거나 안 될 거라 미리 실망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야죠. 자기 주변부터 바꿔가야 하는데,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동안 시위 나가면서 무지개띠를 들고 다니는 걸 보셨을 테니까 적어도 제 존재 자체는 받아들여주지 않을까요?"
그는 최근에 교회를 옮겼다. 정확히 말하면 4-5년간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니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된 거다. 천천히 교회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예정이다.
"예수님도 사회의 민감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분이잖아요. 나도 그렇게 살아야죠. 무력했던 인생에 작은 플랜이 생겼어요."
그는 극우세력들을 적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에 경각심을 갖고 있다. 아무리 싫어도 그들은 같이 살아가야 하는 동료시민이다. 적어도 우리는 어떤 집단을 향해 포기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절대 사람을 포기하지 말 것, 그것이 신앙 안에서 그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사회문제에도 좀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활동할 의지가 생겼다. 파면이라는 큰 고비는 넘겼지만 크고 작은 집회가 여전히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고,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이 우리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가려 한다.
"탄핵집회가 끝났으니 시간이 비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뿐 아니라 다른 동지들도 투쟁일정으로 빼곡하게 채우고 있어요. 구미옵티컬, 세종호텔, 사회대개혁 토론장, 금강보 철거 등등... 우리가 필요한 곳에 가야 한다는 책임감과 배우겠다는 자세도 놓치지 않으려 해요."
그는 언론개혁과 노동개혁이 우선되어야 사회대개혁이 가능하다고 본다. 연대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야 시작되는데, 상대도 나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게 관건이다. 지금의 언론은 상대와 나를 갈라 치기하고 분노의 칼을 서로에게 돌리게 만든다. 노동개혁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동시에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산재청구인인 그에게는 생존이 걸린 중대한 문제이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노동량이 너무 많으면 그 사람이 아프거나 일을 못하게 될 경우 위로가 아니라 비난하게 돼요. 그 일이 고스란히 주변사람에게 주어지니까요. 그 사람이 피해를 준다고 느끼는 거죠. 기본소득이 같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시급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소득도 줄어들기 때문이에요. 기본소득이 있어야 노동약자도 살아남을 수 있어요. 사람이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게 정치잖아요."
민주당이 과연 노동개혁을 할지 걱정이다. 어쩌면 앞으로는 민주당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대선이 끝나면 그는 작은 정당에 힘을 실어주려 한다. 비례대표제 등을 통해 다당제로 구도를 바꾸는 것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는 얼마 전 그림과 글, 타로 커미션을 열었다.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라 덕질로 갈고닦은 실력을 생계에 써먹는 거다. 그는 <슬램덩크> 덕후로, 꽤 인기 있는 2차 창작자다. 벌써 9권의 책을 냈고, 지금도 써놓은 원고가 꽤 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린이 판타지 시리즈를 읽으며 컸다. 판타지 속 세상을 살짝 비틀어보거나 새롭게 상상하는 게 익숙했다.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2차 창작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원하는 글이나 그림을 그리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런 시도를 통해 이야기를 만드는 감각이 생긴 것 같다.
"최선을 다해 버티다 보면 인생에는 때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걸 <슬램덩크>의 송태섭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살풀이하는 것처럼 자꾸 쓰게 되네요."
광장에 덕후가 많아서 더 편하게 광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쉽게 공감대 형성이 되었고 인권감수성이 높은 편이라 서로 존중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어서 편안했다.
"광장에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살짝 엿봤어요. 성경구절 중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는 구절이 있거든요. 나는 오래 살 생각이 없어요. 살아있는 동안 뭘 할 거냐 하면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천국을 보여주고 싶어요."
"사람이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던 그가 느닷없이 "나는 오래 살 생각이 없어요"라고 말해도 놀랍지 않다. 기독교, 퀴어, 슬개골 장애, 우울증, 공황장애, 여성, 노동약자, 빈민 등등...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있는 그에게는 예사로운 일일 테니까. 그보다 궁금하다. 그가 엿본 천국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용기 없이도 받아들여지는 광장처럼 존재 자체로 순순히 받아들여지는 삶이 여기 이 땅에도 뿌리내렸으면, 오래오래 투쟁하면서 그가 엿본 천국을 이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