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으로 살아남기'는 40대 내향인 도시 남녀가 쓰는 사는이야기입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지방 발령으로 의도치 않게 주말부부가 되었다. 그 시점부터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의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한참 에너지 발산이 필요한 시기라지만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놀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면서 걱정과 불안이 엄습해 왔다.
"아들, 일주일에 2번은 엄마랑 놀아줘."
아들 핑계로 시작한 배드민턴 "내가 너는 이긴다"
무턱대고 아들에게 같이 운동을 하자고 졸랐다. 한참 친구가 좋은 나이, 싫다고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같이 운동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매주 화요일, 목요일 아들과 배드민턴 레슨을 받았다.
호기롭게 잘해보자고 했지만, 어색하고 낯선 공간에서 태연하게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쿵쾅거리는 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아들 손을 꼭 잡고 체육관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운동하자고 해서... 불편한 마음을 감수해야 할 시간이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15분 레슨 결과물셔틀콕에 맺힌 땀방울 ⓒ 김지호
아들 핑계로 시작한 배드민턴 레슨은 체력과 인내 뿐만 아니라, 혼자여도 괜찮다는 강한 의지도 필요했다. 레슨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아들과 배드민턴 셔틀콕을 주고받으며 살짝 몸풀기를 시작했다. 운동을 좋아하고 습득력이 빠른 아들은 날아오는 공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허공에 라켓만 휘휘 젓고 있는 나와의 난타(공을 주고 받는 것)를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 나 그만할래, 재미없어"
급기야 아들은 배드민턴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억지로 운동을 시키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 총무에게 다가가 아들이랑 난타 좀 쳐달라고 부탁했다. 나와는 심드렁하게 공을 주고받던 아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배드민턴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순간 알 수 없는 의지가 발동했다.
"내가 저 녀석은 이긴다."
열심히 해야 할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그런데 설상가상 아들이 무릎을 크게 다쳐 운동을 며칠 쉬게 되었다. 덩달아 나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엄마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혼자 체육관을 갔다. 아들이 다시 체육관을 찾게 되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어라? 근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들과 교대로 받던 15~20분 레슨을 혼자 받다 보니, 마치 한 시간처럼 느껴졌고 금방이라도 숨이 꼴딱 넘어갈 것처럼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온전히 지탱하지 못하고 주저앉기 일쑤였다.
그러는 동안 땀구멍이 열렸는지 평소 흘리지 않던 땀이 얼굴에서 가슴으로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땀으로 옷이 젖는 묘한 쾌감으로 분출되는 아드레날린을 살면서 처음 느껴봤다.
훅 들어온 인사 "다음엔 저랑 게임해요"
운동이라고 하면 혼자 할 수 있는 요가, 필라테스, 헬스가 전부였다. 그것마저도 낯선 사람들과의 어색한 공간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 오래 다니지 못했다. 배드민턴은 좀 달랐다. 나를 향해 날아오는 셔틀콕을 정확하게 때리기 위해 라켓을 휘두르다 보면 '탁' 경쾌한 소리에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그동안 몰랐던 내 안의 운동 에너지가 깨어났다. 인생 운동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배드민턴은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운동이다. 단식과 복식(남복, 여복, 혼복) 으로 구분되지만, 실력에 따라 급수가 다르다. A, B, C, D, E(초심)으로 구분되며, 흔히들 급수가 맞는 파트너와 비슷한 실력의 상대 팀을 만나 게임을 한다.
나는 잘 하는 회원들의 게임을 관전하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꼈다. 긴장감이 최고조가 된다. 강력한 스매싱, 그걸 받아내는 정확한 수비,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숨 막히는 랠리. 눈을 뗄 수 없는 선수들의 박진감 넘치는 움직임에 덩달아 몸이 꿈틀거렸다.

▲배드민턴 라켓을 손에 쥐면 용기가 생긴다처음 시작한 배드민턴, 처음 갖게 된 라켓 ⓒ 김지호
어느새 배드민턴을 친 지 7~8개월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낯선 공간이 익숙해지고 어색한 눈인사가 늘었다. 그때 총무님이 말을 걸었다. 벌겋게 익어 있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익살스러운 미소로 "왜 맨날 레슨만 받고 가세요?"라고.
순간 당황스러워 말보다 손이 먼저 가방을 챙겼다. "아, 집에 아이들만 있어서요"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몇 개월 동안 내 행동을 지켜본 총무님은 나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이들 다 컸잖아요, 레슨만 받고 가면 실력 안 늘어요, 게임도 같이해야죠."
"다음에 저랑 같이 게임 해요."
"네."
짧은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욱신거리던 몸도, 무겁게만 느껴지던 가방도 가벼웠다. '다음에 저랑 같이 게임 해요.' 그 말에 설레는 마음이 어색했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면 부담스러워 한 발짝 물러서던 나에게 '다음에 저랑 같이 게임해요'라는 말은, 보잘 것 없는 실력의 소심한 초심자에게는 무한한 긍정의 메시지였다. 아무리 내가 내향인이라도 이런 메시지를 피해선 안 된다. 먼저 다가갈 분명한 이유가 생겼으니.
아직 파트너는 없지만, 5월에 열리는 배드민턴 구청 대회에도 나가볼 참이다. 나만의 방법과 나만의 속도로 파트너가 있는 이 운동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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