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는 7월 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초현실주의와 한국 근대미술' 전에서는 1950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1950년에서 1980년 사이, 드물고 희귀하게 초현실주의 작품을 이어간 화가들(김욱규, 김종남, 일유 김종하, 신영헌 등) 6명의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20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진 작가를 발굴, 재조명해서 보다 풍요로운 미술사를 복원하겠다"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기획에 맞게, 이번에 접한 생소한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들은 신선하고, 놀라웠다.

덜 알려진 한국의 초현실주의 작품들

 김종하, <선인장>, 1977.
김종하, <선인장>, 1977. ⓒ 전사랑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서구의 이성과 합리를 비판하고 꿈, 환상, 무의식, 신비주의 등을 통해 인간 정신을 해방을 꿈꾸며 등장한 사상이다.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사물이 가진 의미를 확장시키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꿈과 환상이 일상적인 세계에 침투하고 꿈과 현실,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또한 인간의 정신 해방을 주장하며 의도적으로 금기를 깨며, 이전의 인간이 추구하던 이성과 합리로 이루어진 체제를 전복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 시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한국전쟁과 분단을 경험하고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초현실주의는 그 의도부터 급진적이고 이질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전시도록에서 박혜성 학예연구사가 밝혔듯 "자생성, 독자성, 민족성, 정체성 담론과 실천"이 한국미술에서 무엇보다 우선시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초현실주의 작품을 이어나간 화가들은 대개 고독하게 홀로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스스로를 명명하거나 사회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대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작업을 이어 나갔다.

그들은 한국 화단과는 거리를 두고 은둔하거나 아예 프랑스나 미국에서 활동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몰두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초현실주의는 서구 초현실주의 작품에 비해 서정적이고 사적으로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1 전시실에서는 작가가 초현실주의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으나 작품 속에서 초현실주의적 감각을 보여준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천경자의 <전설>(1962), 박래현의 <여인과 고양이>(1959), 김원숙 <나무 그림자>(1979)와 같은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눈에 띈다.

 김원숙, <나무 그림자>, 1979. 전시장 촬영
김원숙, <나무 그림자>, 1979. 전시장 촬영 ⓒ 전사랑

김원숙의 <나무 그림자>는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상징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성의 그림자가 나무의 뿌리로 그려져, 빛을 보지 못하는 여성 화가의 상징적인 자화상을 보여준다.

 박래현, <밤과 낮>, 1959.
박래현, <밤과 낮>, 1959. ⓒ 전사랑

박래현의 <밤과 낮>도 마찬가지다. 낮과 밤의 여인이 중첩적으로 그려져, 평온해 보이는 '낮의 여인' 뒤에 예민한 감각으로 날이 서 있는 '밤의 여인'이 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컸던 당시, 여성화가들의 깊은 내면과 정신세계를 표현하기에 초현실주의는 어쩌면 적확한 화법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에서 괴리를 느낀 작가들

어떻게 보면 한국작가들의 초현실주의는 이상과 현실에서 괴리를 느낀 작가들의 예술적 돌파구가 아니었나 싶다. 이번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 안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1914-), 김욱규(1911-), 김종하 등의 삶과 작품에서도 그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15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김종남은 '가나코 히데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후 마나베 집안에 양자가 되어 '마나베 히데오'로 개명했다. 그가 15살에 홀로 일본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인이 된 그는 자신을 '교토 출신 가나코 히데오'라고 소개했고, 한국인임을 철저히 숨기고 살았다. 그런 이력 때문인지 김종남 작품을 이번 전시에 소개하는 것, 그리고 도록 표지로 그의 작품을 사용한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김종남, <새들의 산아제한>, 1978.
김종남, <새들의 산아제한>, 1978. ⓒ 전사랑

그럼에도 최초로 한국에 소개된 그의 작품이 의미 있는 것은 외부에서는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았던 그가 작품에서나마 자신을 표출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새들의 산아 제한>에서 보호색 아래 숨어있는 동물, 웃고 있는 여성의 형상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고 기괴해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식물의 표현도 아름답다기보다는 무성하게 빽빽하고, '보호색' 안에서 무엇을 만날지 모르는 불안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김종남은 직업적으로도 이중적 삶을 살았다. 미군 기지에서 자동폭격조준기의 도면을 그리며 30년간 근무했던 그는 밤에 작업을 이어나갔고, 65살이 되어서야 정년퇴직하며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나의 풍경>, 1980. 전시장 촬영.
김종남(마나베 히데오), <나의 풍경>, 1980. 전시장 촬영. ⓒ 전사랑

이는 30년간의 직장생활 후 그린 <나의 풍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머릿속에는 직장생활을 상징하는 돈도 있고, 직장생활 내내 그렸던 비행기 도면도 있고, 그의 작품에서 등장했던 식물과 곤충들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던 식물들도 힘없이 처져 있거나 갈색빛으로 시들어 말라 있다. 비행기도 흩어져 땅에 떨어져 부서져 있다. 노년의 기억에 남은 전쟁의 충격에 더해, 쉽지 않았던 그의 직장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다. 김종남에 있어 오로지 예술만이 진정한 집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자화상이었다.

김종남만큼이나, 김욱규(1911-1990)의 작품과 인생도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사후에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유족은 따르지 않고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1944년 강제징용되기도 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월남하는 과정에서 아내와 3남 1녀와 떨어지게 된다. 속초에 정착한 뒤 재혼해 다시 가정을 꾸렸다.

함흥 출신으로,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분리되어 새 삶을 꾸려야 했던 삶도 그에게 대단한 죄책감으로 남았다. 김종남처럼 그도 화가로서의 삶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 그는 미군기지에서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리다 자신의 골방으로 들어가 1970년대부터 1990년까지 4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작품을 팔 생각도 없었기에, 제목이나 연도도 표시하지 않았다. 가족 부양은 아내가 했다.

 김욱규, <제목 없음>,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
김욱규, <제목 없음>,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 ⓒ 전사랑

삶과 일상을 뒤로하고, 김욱규는 자신의 작품으로 도피한 듯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심리 상태를 통해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내쳐진 상황에서 예술이 곧 그의 생존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깨진 유리에 남성과 여성이 비친다. 작가의 환상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하다. 인물들에 반해 세밀하게 묘사된 곤충들이 꺼림칙하고 섬뜩하다. 어쩌면 유리에 비친 환영을 그리듯, 그의 삶도 현실에서 부재하는 어떤 것을 잡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유럽에서 인정 받은 한국 작가들

자신의 현실 세계를 넘어서, 한국 밖으로 경계를 확장시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김종화와 황규백의 작품도 만날 수 있었다. 김종하(1918-2011), 황규백(1932~)은 사실 한국보다 유럽에서 인정을 받은 작가들이다.

김종하는 무의식과 의식세계를 넘나들듯이, 다양한 조형언어를 구사한 작품을 선보여 왔다. 초현실주의 기반이 약한 한국화단에서 벗어나 1956년 파리로 건너가 활동하면서, 2002년 프랑스 정부의 루벤스 훈장을 수훈했다. 김종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가 기법적으로도 많은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화가임을 알 수 있다.

 김종하, <어떤 순간의 영상>, 1969.
김종하, <어떤 순간의 영상>, 1969. ⓒ 전사랑

<어떤 순간의 영상>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기물을 표현하고 있는데 1960년대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안과 밖,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불분명한 새, 검은 병 위에 떠 있는 듯한 투명한 유리 등, 일상적 정물과 풍경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
 김종하 누드화
김종하 누드화 ⓒ 전사랑

이 누드화는 김종하의 자유롭게 넘나드는 기법과 완결된 예술세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실재한 모델을 그린 사실적인 누드화인데도 불구하고 살결의 표현과 공간의 명암만으로 환영 같은 그림이 되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풍에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결합한 탁월한 감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규백(1932~)은 1968년 요코하마를 거쳐 프랑스로 가서 판화를 배우고 미국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피카소, 샤갈 등이 판화를 찍은 공방 '아틀리에 17'에서 스탠리 윌리엄 헤이터에게 판화를 배웠다. 그는 판화 중에서도 판을 직접 긁어서 표현해야 하기에 가장 까다롭고 힘든 메조틴트 기법을 전수받았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부드러운 색감과 독특한 질감을 표현한 그의 작업은 처음부터 잘 팔려 김환기, 백남준도 부러워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후 1974년 영국 브래드포드 판화 박람회 대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그의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 브리티쉬 뮤지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도 소장 중이다.

 황규백의 작품들
황규백의 작품들 ⓒ 전사랑

황규백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기법 중 하나인 '데페이즈망' 기법이 잘 구현되어 있다. 일상적 오브제를 그 환경에서 떼어내어 배치시켜, 낯설고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법이다. 그는 일상세계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손수건을 핀셋으로 꼽는다. 손수건으로 인해 경계가, 그리고 '안과 밖'이 생기지만 그 어떤 경계보다 가볍고, 자유롭게 바람에 흩날린다.

각각 흩어져 자신만의 초현실적 작품을 구현해낸 화가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 미술을 더욱 새롭게 환기시켰다. 입장료 2000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초현실주의#서울전시#국립현대미술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문학을 공부하러 영국에 갔다 미술에 빠져서 돌아왔다. 이후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에 관련한 글을 쓰고 있다. srjun09@naver.com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