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27일 미국 이민 및 세관 집행관들이 메릴랜드주 실버 스프링에서 집행 작전 전 브리핑을 위해 모여 있다. ⓒ AP/연합뉴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당선 된 트럼프가 밀고나가는 정책 중 한 가지는 '불법체류자 추방'이다. 사실 처음엔, 국가의 수장으로서 국민의 안전을 챙기려면 쓸 수 있는 정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뉴스를 통해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니 오히려 국민을 위협하는 듯한 모습이더라.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식사 때 작은 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엄마, ICE(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 이민세관단속국)가 학교 주변이나 집 근처에 나타나서 유색 인종이 보이면 무작정 따라간대.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 보는데 운 나쁘면 신분증을 보여줘도 잡아가고 그런대!"
그땐 '아이들끼리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을 뿐이었고 우리는 미국에서 영주권자로 체류 하고 있기에 신분이 불안정한 것도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ICE의 활동에 관해 쏟아지는 뉴스들을 보니 슬슬 걱정이 되고 무섭기도 했다. 시민권자도 의심하여 구금하는 세상이 됐으니 아무리 합법적인 체류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눈엔 우리도 똑같이 유색인종일 뿐이기 때문이다.
긴장이 현실이 된 순간
그리고 불과 며칠 뒤, 그 긴장은 현실이 되었다. 아니, 현실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우리 가족을 덮쳤다.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학교에 간 딸아이가 가족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다른 친구의 핸드폰 화면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 화면엔 아이들끼리 채팅을 주고받은 흔적이 담겨 있었다. 뭐지 싶어서 확대해 읽어 봤다가 화들짝 놀랐다.
지금 우리 동네 학군으로 ICE가 들어왔는데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채팅에 참여한 아이들은 무장한 요원들이 들어올 상상을 하며 모두 불안해 하고 있었고, 나 또한 그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부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려 했지만, 딸이 전해줬던 그날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쾅쾅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색인종이라면 무작정 따라간다던 ICE 요원들의 이야기. 억지로 신분을 요구하고, 심지어 구금까지 한다는 이야기.
내가 지금 학교로 가봐야 할까? 간다면 관련된 모든 신분증과 서류를 들고 가야겠지? 가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하며 그것들을 보지도 않고 데려가려 한다면 그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몸은 굳어버렸고 머리 속은 백지가 됐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불안이 온몸을 덮쳤고 아이들이 지금 그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수업시간엔 핸드폰 사용이 금지되어 있기에 사실이 확인되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메시지를 남겨 놓고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길던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핸드폰을 손에 쥐고 집안일을 마무리 하던 중 연락이 왔다. 너무나 다행히도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라는 메시지였다. 그 순간의 안도감이란. 순간,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휘둘려 긴장했던 시간이 생각나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만큼 어른도 아이도 이 땅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 긴장하고 살고 있구나 싶었다.
시민권자도 안심하지 못하는 나라 미국

▲지난 4월 15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미 해군 중위들에 대한 트로피 수여식에 참여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EPA/연합뉴스
"아빠가 그린카드 사진 보냈으니까 꼭 가지고 있어."
그날 저녁, 남편은 가족 단톡방에 그린카드 사진을 보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민감한 정보니까, 개인정보 유출 위험 때문에 그 어떤 디지털 보관도 하지 않았던 서류였다. 하지만 그날 만큼은 생각이 달랐다.
"혹시라도 다음에 정말 ICE가 와서 뭐라고 물어보면 이거 바로 보여주면 돼."
남편의 말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아이들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날 아무 일도 없었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린카드 사진을 아이 손에 들려줘야 안심이 되는 나라, 그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다. 최근 뉴스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시민권자도 추방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고 했다. 실수였다고 인정은 했지만 시민권자도 안심 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다니.
미국 시민권자도, 영주권자도, 이제는 '합법 체류자'라는 지위가 더 이상 방패가 되지 못하는 시대.
정당한 절차 없이 거리에서 혹은 학교에서 단지 외모와 피부색만으로 신분을 의심받는 현실. 한인 사회에서는 모임을 자제하고 외출시엔 항상 그린카드와 변호사 명함을 들고 다니라고 권하고 있다. 대체 이 나라에서 누가 안전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트럼프는 여전히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친다. 하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현실은 "공포 퍼스트"다. 정치적 구호가 사람들의 삶을 짓누르고, 가족들을 위축시키고, 아이들에게 불안을 안겨준다. 그날 딸에게서 온 메시지는 달랑 사진 한 장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때부터 끝나지 않는 긴장 속에 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