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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일행과 김준엽이 모처럼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는 다음날 새벽 2시경, 사령관이 김준엽을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다음날 국부군 한치륭(韓治隆) 사령관과 일군 수비대장의 담판이 있는데, 김준엽을 통역으로 대동한다는 것이다. 쯔까다 부대의 제1호 탈출병이 중국군 유격대 사령관의 통역으로 가게된 것은 이만저만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일본군은 김준엽의 탈출이 알려지자 그가 팔로군에 붙잡혀 죽창에 찔려 죽었다고 선전했었다. 바로 그 사람이 중국군 유격대 사령관의 통역으로 나타났을 때 일군 간부들의 심사가 어떨지는 상상이 쉽지 않다. 그런데 우려되는 일은 간악한 그들이 한 사령관이나 김준엽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장준하와 동지들은 이 같은 우려를 표명했지만 이미 결정된 담판을 취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담판의 장소가 양국군의 중간지대라는 사실이 한가닥 위안이 되었다.

다행히도 얼마 뒤에 김준엽은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대하였다. 하지만 그가 가져온 소식은 또 한번 동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일군 수비대장이 일군에 포로가 된 중국군 30여 명과 유격대에 강제 억류되어 있는 군인 수 명과 맞교환 하자는 제의를 했다는 것이다. 김준엽은 이 같은 일군의 제안을 직접 통역하였고, 일군측에서 포로 명단의 별지까지 가져와 이쪽에 보여주었다는 설명이다. 일순 숨이 멈추는 듯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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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러운 것은 한 사령관이 자기 부대에는 강제 억류된 일본군인이 한 명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준하 일행의 우려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자기네 동포 30여 명과 이국의 청년 몇 명과 바꾸는 것은 이문이 큰 거래이기 때문이다. 언제 마음이 돌변하여 교환하고자 할 때에, 자신들의 운명은 어찌되는가.

"중경으로 가자, 우리의 참된 영도자들이 계시고 우리 조상의 그림자가 지금 중경에 있다면 그리로 가자."

장준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의 아픔이 새로운 결심을 굳혀주었다.
"중경으로 가자. 죽어도 그 곳서."
그 별지 명단을 김준엽도 분명히 보았다고 한다. 결코 허위명단은 아닐 것이다. 한 사령관의 의(義)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무리 한국인 청년을 사랑한다 하여도 자기의 부하, 자기 민족, 자기 형제의 30여 명과 어떻게 견줄 수가 있을까.

5 대 30의 비중이 우리를 괴롭혔다. 도저히 인간 한치룡이 겪었을 그 인간적인 고뇌에 보답할 길이 없을 것 같이 생각되었다.

부드득, 이가 갈렸다. 일군의 그 잔인성이 우리에게 그대로 옮아 온 듯이 우리의 증오감엔 불이 붙었다. 또 앞으로 어떤 조건을 제시해 올는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대가로 우리의 인도를 요구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인도된다면 우리는 '탈출병의 최후'라는 그들의 연극에 사체의 연기자로 등장할 것이다. 팔로군의 만행이라는 변명 속에 온갖 짓을 다 당해 죽여서 우리 한인 학도병 앞에 전시될 것이다.

장준하는 또 다시 닥치는 위기감에서 몸을 떨었다. 이 부대가 조국의 군대이고 한 사령관이 동포였다면 우리가 그 은혜에 대해 이렇게 괴로워하고 또 불안해 할 리가 있겠는가, 생각할 때 나라 없는 슬픔을 짓씹어야만 했다. 잠을 자지 못하고 뒤채이면서 새삼 망국의 설움과 나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는 결의를 거듭거듭 다졌다.

우리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위해 나는 가련다. 나의 일생의 과정은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의 푯말을 꽂고 이제부터 나를 안내할 것이다. 하나님이 날 기어이 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뒷날 장준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는 중국 서주의 중국군 수비대 병사(兵舍)에서 거듭 다져진 의지의 표현이었다. 평화시에 호텔방이나 연구소에서 만든 정치적 구호와는 '출생성분'이 달랐다. 삶과 죽음의 갈래 길, 바로 한 순간의 생명도 담보하기 어려운 극한상황에서 창안된, 그래서 육화(肉化)된 이데올로기였다.

새벽 2시경 비상이 걸렸다. 유격대 사령부의 소재지가 일군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밤 사이에 부대를 이동한다는 것이다. 부대원들을 따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이리저리 우회하면서 40여 리의 길을 걸었을 때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앞을 바라보니 자신들이 유격대에 잡히던 바로 그 지역이었다. 혹시나 따라붙을 지 모르는 일군 감시병을 따돌리느라고 일부러 돌고돌아 그곳에 새 사령부의 자리를 잡은 것이라 했다. 새로운 사령부 기지에서 환영잔치가 베풀어지고, 장준하 일행은 모처럼 배불리 먹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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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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