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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시절의 장준하 1945년 8월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군 OSS 특수훈련을 마치고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의 어느 사진관에서 찍었다. 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선생이다.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1945년 8월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군 OSS 특수훈련을 마치고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의 어느 사진관에서 찍었다. 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선생이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1940년대 초반 중국 대륙의 세력 판도는 어지러울 정도의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의 국부군, 공산당의 팔로군과 신사군(新四軍), 일제침략군, 일제괴로군인 왕정위군, 여기에 토비(土匪)들까지 얽히고 설키면서 일정 지역을 장악하고 또는 합종연횡을 이루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난을 당한 중국대륙은 이데올로기 다툼으로 갈리고(국부군과 공산군), 매국세력(왕정위군)이 한간(漢姦)이 되고, 이런 틈새를 노려 사익을 추구하는 토비들이 각지에서 크고 작은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다보니 아군과 적군, 연합과 적대세력이 바뀌거나 혼재되어 서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큰 세력은 장개석의 국부군과 모택동의 팔로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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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일행이 쯔끼다 부대를 탈출하여 최초로 부딪히게 된 부대는 장개석 주석의 국부군 이었다. 한국독립운동에 우호적이어서 일본군 탈출병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일행은 일본군의 삼엄한 추적을 받으며 냇물을 건너고 마을을 거쳐 다시 강을 건너고 하여 본부인 듯한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가는 길목마다 나뭇가지 위에서 총을 든 경비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마치 어느 마적단의 소굴로 끌려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일행은 대장인듯한 중년 사나이 앞으로 안내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장준하는 한국의 청년들로서 일군을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길이며, 우선 중국군에 편입되어도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를 지켜보던 대장인 듯한 사내가 "우리는 중국 중앙군 소속의 유격대이고, 우리의 영수는 장개석 총통이다."라고 종이에 썼다. 마치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나는 격이라고나 할까, 세사람은 순간 기쁨의 소리를 지를 뻔하고 얼싸안고 울고 싶었다.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잃어버린 동지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이 왈칵 솟아올랐다.

중년의 사나이는 이십 리 북방에 이 부대의 사령부가 있고, 오늘밤 안으로 그곳에 당신들을 인계할 것이며, 그곳에서는 한국인 혁명동지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2시간쯤 휴식을 취한 다음 사령부로 출발하게 되었다. 해가 저물었지만 지열은 여전히 확확달아오르고 있었다. 다시 강을 몇 개 건너고 산굽이를 돌아서 이윽고 조그마한 마을에 도착했다. 생각보다는 규모가 초라한 사령부의 모습이었다.

얼마 뒤에 중국군복을 입은 한 홍안의 청년이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말로 "한국분들이죠?"하고 물었다. 그는 5개월 전에 쯔까다 부대를 탈출한 한국 학도병 탈출병 제1호인 김준엽 (전 고대 총장)이었다. 김준엽은 세 사람을 차례로 껴안으면서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해주었다. 꿈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의 배려로 배불리 먹고 편한 자리에서 쉬고 있을 때 또 꿈같은 기적이 나타났다.

실종되었던 김영록 동지가 나타난 것이다. 강을 건너기 전의 그 수수밭에서 방향을 잃었고 추격자들의 총격이 너무 심하므로 그대로 그 자리에 엎드려 있다가, 방황 끝에 이 부대에서 수배한 수색대에 의해서 구출된 것이라 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다시 만난 네 사람은 생환의 기쁨과 향후의 진로 문제 등을 논의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당시 이들을 맞이한 김준엽은 그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썼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할 때이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손 참모가 하는 말이 '일본병사'들이 방금 도착하였다는 것이었다. 마당으로 뛰어나가 보니 일본군복 차림의 청년 셋이 서 있었는데, 그 지성적인 얼굴과 느낌으로 대번 나는 나와 같은 한국의 '학병'일 것으로 단정했다.

"한국 분들이죠?"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차례로 꽉 끌어 안았다. 나는 이때처럼 감격에 차고 희열에 넘친 일은 없었다. 이제 한국인의 동지가 생긴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려는 씩씩한 동지들을 얻은 것이다.

나는 우리 몇몇이라도 백만의 독립군이 조직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 청년이 바로 장준하·윤경빈·홍석훈이었고 함께 탈출한 김영록은 중도에 흩어져서 그날 밤 자정께나 사령부에 도착하였다. 나와 장준하 형과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인데 이로부터 그와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년 8월에 별세할 때까지 연인처럼 일생 고락을 함께하게 된다.(김준엽, <장정> 1)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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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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