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늠하기 어려운 시간이 지났다.
장준하는 잠결에 기차의 기적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고 회색의 어둠이 짙은 속에서 기적소리가 들렸다. 서주에서 동북방향으로는 철도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적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동지들을 깨웠다. 그리고 향후 대책을 상의했다. 지금까지 일본군의 관할지역 안에서 뱅뱅 돌았던 것이 아닌가. 장준하의 설명에 놀란 동지들은 차라리 큰 길로 나가 인가를 찾아서 먹을 것을 구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굶고 참겠느냐는 논의를 거듭하였다.
바로 그 때에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새벽부터 비료로 쓰기 위해서 망태를 매고 개똥을 주으러 다니는 농부였다. 눈 앞에서 더 따지고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큰 길로 나가 농부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배고픔과 피로에 싸인 처지에서 마을까지만 가면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얼마를 뒤따라가니 밭머리에서 농부들이 새벽부터 일을 하고 이른 아침을 내다 먹고 있었다. 장준하 일행을 발견하고는 손짓을 하다가 소리를 쳐 불렀다. 말이 통하지는 않지만 와서 먹으라는 뜻이었다. 먹지 말라고 해도 달려들 처지가 아닌가. 농부들은 준비해온 중국음식 쨈빙을 절반도 먹지 못한 채 낮선 불청객들이 다 먹어 치워도 겉으로는 조금도 아까와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땀과 흙에 절어 후레해진 몰골이지만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일군에게 함부로 대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이곳 농부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먹던 음식을 넘겨준 것이다. 농부들을 상대로 엉터리 중국말과 땅에 글씨를 쓰는 등 손짓, 필담을 통해 알아낸 바로는 탈출한 서주의 쯔까다 부대가 불과 사오리 근처이고, 삼십 리 밖에 팔로군(八路軍)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3일 동안 폭염과 어둠과 싸우면서 탈주해 온 힘든 노정이 결국 일본군 관내를 맴돌았다는 놀라운 사실에는 황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린 배를 채우고 주머니를 털어낸 돈으로 쨈빙을 사자고 했더니 늙은 농부가 자기가 사오겠다면서 마을로 돌아갔다.
이것이 사단이 되었다. 1시간 여가 지난 뒤 농부가 쨈빙을 사와서 일행은 무거운 마음으로 북쪽 산을 향해 행군을 하고 있을 때이다. 수상한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총을 쏘면서 뒤쫓아 왔다. 장준하 일행은 본능적으로 뛰었고 수수밭으로 몸을 숨기면서 달렸다. 쫒고 쫒기는 질주가 계속되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앞에는 강이 나타났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막혀버렸다. 여기서 붙잡히는구나, 하고 하늘을 우러러 망연한 순간에 강 기슭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막산 굽이를 돌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일행은 배가 기슭에 닿기도 전에 건너뛰어 배에 올랐다. 배에 올라타고 보니 김영록 동지가 보이지 않았다. 쫒기는 과정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어디론가 행방불명이 되고 만 것이다.
배 안에는 네 사람이어야 할 동지가 셋밖에 없었다. 뱃사공까지 넷이었다. 장준하는 돼지 셈법으로 자신을 빼놓고 넷인가 하고 두세 번 두리번 거렸으나, 분명 있어야 할 김영록 동지가 배 안에 없었다.
잠시 일행은 아무 말도 못하고 파랗게 질려버린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소리를 질러 김 동지를 부를 수도 없고 또 뱃머리를 되돌려 가서 찾아볼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는 동안에 배는 강을 건넜다. 세 사람은 강 기슭 수풀 속에 엎드려 김 동지의 모습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래도 그의 모습은 나타나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우리는 맛손을 잡고 잠시 눈물을 나눈 뒤에 다시 전진을 하기로 했다.
"아아, 김 동지!"
우리가 셋이서 목소리를 합쳐 김 동지를 부르려고 했을 때 또 다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지체한 만큼 가깝게 들렸다. 수풀에 가리워 보이지는 아니했으나 분명히 총성은 강변에 다다른 것 같이 접근된 거리감을 알려주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김 동지를 찾지 못한 채 뛸 수밖에 없는 노릇, 강 건너에도 역시 수수밭은 있었다. 우리는 수수밭 사이로 들어가 뛰었다. 이윽고 총성은 강을 건너온 듯 싶었다.
김영록 동지를 잃어버린 채 세 사람은 삼십 리 길을 쫒겨 마을 근처에 이르러서 추격자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구식 모젤 권총을 뽑아든 추격자들은 코 앞에까지 나타났다. 가까이서 지켜보니 일본군은 아니고 왕정위군이 아닌가 했지만 복장으로 보아 그도 아닌 것 같았다. 앞서 농부들로부터 팔로군이 인근에 있다는 말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래서 장준하는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땅바닥에 한문으로 "우리는 한국청년, 그저께 밤 일군 병영을 탈출, 지금 팔로군 진영을 찾아간다."는 내용을 썼다. 이를 지켜보던 추적자들의 표정이 달라지더니 역시 땅바닥에 "우리가 그 팔로군이다"라고 한문으로 답했다. 장준하의 예리한 통찰력과 재치가 일단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