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동장 가득한 조문객들'세월호 침몰사고' 12일째인 2014년 4월 27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 조문하기 위해 온 시민들이 인근 고잔초등학교 운동장까지 가득 메우고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몇시간씩 기다려야하는 긴 줄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 권우성
수습과 구호의 연대: 함께 슬퍼하고, 함께 움직인 시민들
2014년 4월 16일 아침, 바다 한가운데에서 실시간으로 중계되던 세월호의 침몰 장면은 모두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가장 먼저 탈출한 선장과 선원, 눈물 한 방울 외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대통령. 이 모든 장면은 국민을 절망과 분노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절망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희망도 보았다. 정부의 무능이 드러난 순간, 시민들은 주저 없이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웃을 위해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피해자 가족과 함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밤을 지새우고, 식사와 물품을 나르고, 작은 역할이라도 나눠 맡으며 기꺼이 위로자가 되었다. 단 이틀 만에 민간잠수사를 비롯한 2천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 팽목항과 진도실내체육관을 찾았고, 연말까지 총 연인원 5만 명 이상이 현장에 참여했다. 이는 국가의 부재를 채운 시민의 연대를 증명한다.
시민들의 참여는 봉사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추모 활동으로 확장되었다. 가장 보편적인 참여는 분향소 방문이었다. 열흘 만에 전국 곳곳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와 정부 합동분향소를 찾아 수많은 이들이 조문했다. 4월 30일까지 안산 임시정부합동분향소를 찾은 조문객은 모두 22만 6천명에 이르렀다. 온라인 분향소에는 개설 하루 만에 8만 명의 추모가 이어졌다.
일상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참사 이틀 뒤인 4월 18일 한 대학생 동아리를 비롯한 시민들이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마음에서 '노란 리본 달기'를 시작했다. 그 마음은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어느새 수많은 노란 리본이 청계천 광장을 가득 메웠고, 도시 곳곳, 시민들의 가방과 옷자락에도 달려졌다. 세월호참사가 벌어진 4월 16일 밤부터, 생존자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추모 촛불행사가 연일 지속되었다. 안산 시민들은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은 광화문에서 무사귀환을 외쳤다. 노란 리본은 거리뿐 아니라 SNS에서도 시민들의 프로필 사진을 채웠다.

▲국회 앞 특별법 서명전달 전달식세월호 참사 가족들을 비롯한 시민 1천여명, '세월호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 350만여명의 서명용지를 국회에 전달하는 전달식에 참여 ⓒ 4.16기억저장소
기억 네트워크: 잊지 않기 위한, 변화를 요구하는 공동체의 연대
참사 이후에도 정부의 무능이 지속되자, 시민들은 애도를 넘어 무책임한 정부에 대한 목소리를 모으는 '비판적 시민'이 되는 것에 기꺼이 동참했다.
(세월호 참사 관련 시민참여와 자원봉사 / 주성수 한양대) 2014년 5월 안산 합동분향소 앞. 유가족들이 모여 '세월호 진상규명 및 안전한 사회 건설을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이에 화답하듯 전국의 600여 개 단체가 모여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를 발족해 서명운동을 확산했다. 제정 1000만 서명운동을 착수한지 두 달 여만에 총 350만1266명이 동참했고 서명지는 416개의 박스에 나누어 담겨 국회에 접수됐다. 서명은 그 이후로도 이어져 11월 14일 공식 종료일까지 650만명이 서명운동에 동참했다(다시 봐도 정말 어마어마한 수다). 추모 촛불과 노란 리본이 단순한 상징을 넘어 '변화를 향한 강한 요구'가 된 것이다.
그 흐름은 점점 더 깊고 넓어졌다. 전국 곳곳에서 세월호를 중심으로 새로운 풀뿌리 모임과 시민연대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이전에 어떤 역사를 살아왔는지와 관계없이 연대로 함께한 사람들은 세월호로 연결되었다. 국내외 지역과 부문의 자발적인 시민 모임, 종교단체와 모임, 문화예술인과 문화기획, 청년·청소년 모임, 재난참사 피해자 간의 네트워크까지 수많은 시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 공동체를 만들었다. 당시 만들어진 풀뿌리 조직들은 지금까지 그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10주기, 광주시민상주모임의 주최로 열린 '10년의 사람들'행사에서 한 시민은 '10년을 되돌아보니 서로가 안전이었다'고 회고했다. 피해자 가족과 시민은 이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싸우는 공동체'이자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가 되었다.

▲세월호광주시민상주모임, 10년의 사람들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아, 24년 1월 12일, 세월호광주시민상주모임 주관 <세월호참사 10주기- 광주, 10년의 사람들>행사에 참여한 시민과 세월호 가족이 약속다짐이 담긴 등을 들고 웃고 있다. ⓒ 4.16연대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연대와 연대가 서로 연결되며 강한 힘을 만들어갔다. 여러 기억 공동체 네트워크들이 서로 수평적으로 연결되며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메타네트워크)'로 확장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4.16연대'와 '4.16재단'을 비롯해, 국내외 수많은 기억공동체와 실천조직들이 수평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또한, 피해자와 피해자가 연결되며 '재난참사피해자연대'가 만들어졌다. 서로를 지원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기억의 가치를 공동으로 지키기 위한 중간지원조직들도 함께 형성되었다.
4.16기억공동체는 누군가 '세상의 끝에' 있을지라도 그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그 의미를 찾아내며 점차 커지고 있다. 이 네트워크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슬픔을 기억으로, 기억을 행동으로, 행동을 변화로 이끄는 의지의 연결체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우리의 연대는 지속되고 있다. 세월호참사를 목격한 청년들이 본인을 4.16세대, 이태원세대라 칭하며 윤석열 탄핵광장에 나왔다. 잊지 않고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마음은 새로운 연대로 계속 재탄생되고 있다.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재난은 우리가 얼마나 상호의존적인 존재인지,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잘 돌볼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그는 재난 속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타성과 돌봄, 그리고 공동체적 회복력을 '일상의 권위가 무너진 틈에서 드러나는 진짜 인간성'이라고 불렀다.
세월호참사에서도 우리는 진짜 인간성을 발견했다. 정부는 구조에 실패했지만, 시민들은 실패하지 않았다. 팽목항에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은 정부의 부재를 메우며 피해자 가족의 손을 잡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을 넘어 함께 싸우는" 시민들의 연대로 채워졌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일을 내 일처럼 아파하는 선한 마음, 누군가의 존엄이 훼손되지 않도록 함께 하겠다는 공동체 의식은 말 그대로 기적과 같은 모습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변화를 이야기했다. 이는 바로 '연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함께하는 애도'의 의미를 배워갔다.

▲팽목항팽목항에 노란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 4.16연대
기억 공간: 공동체가 만든 애도의 장소들
리베카 솔닛은 '재난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유토피아'는 통상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상적 세계, 그러나 실제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칭한다. 만약 '재난 유토피아'를 실제 지도에서 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
미쉘 푸코는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도, 그 밖의 다른 온갖 장소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의미를 전도하는 장소,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로서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우리는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모이고 연결되며 기존의 공간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재발명했다. 이렇게 탄생한 '기억공간'들은 기억을 지우려는 현재의 관성에 지속해서 반문한다. 동시에 실제 장소에 발붙인 채 재난 유토피아를 현존하게 한다.
매년 주기가 되면 세월호참사 피해자와 시민들은 빨간 등대에 커다란 노란리본이 새겨진 팽목항을 찾는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가 수습되어 돌아오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가족들이 매일같이 기다리던 팽목항은 이제 그 자체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상징의 장소가 되었다.

▲세월호 기억공간 앞 3월 기억문화제세월호 기억공간 (서울시의회 앞)에서 4.16연대가 주관하는 3월 기억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416합창단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 4.16연대
광화문광장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세월호 가족이 처음 단식을 시작한 장소이자, 수많은 시민들이 노란 리본을 만들고 서명을 모으며 진상규명을 외쳤던 연대의 출발점이다. 이후 서울시의회 앞에 자리하게 된 기억공간은, 매주 기억추모행사와 함께 피해자와 시민이 만나는 공간이 되었다.
서울시의회의 다수석이 국민의힘으로 바뀐 뒤 불법 공간으로 낙인 찍혔지만 그럼에도 "이 공간 만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시민 공동체의 굳은 의지로 지켜지고 있다.
안산의 4.16기억저장소는 유가족과 시민이 함께 만든 기록의 공간이다. 기억교실을 걷다 보면 마치 11년 전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단지 과거의 아픔을 저장하는 장소가 아니라,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에게까지 세월호 참사의 교훈을 전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연결고리로 기능하고 있다.
4.16생명안전공원은 올해 첫 삽을 떴다. 뿔뿔이 흩어졌던 아이들이 어린 시절 뛰놀던 그 공간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시민의 염원으로 인양된 세월호는 현재 목포 신항에 거치되어 있으며, 내년 초 국립 세월호 생명기억관으로 착공하여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공적 기억의 장으로 자리 잡아갈 예정이다.
이렇듯 기억이 공간에 뿌리를 내리고나면, 기억 공간은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계속 말을 건다. 지금도 기억공간은 우리가 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지, 왜 잊어서는 안 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하게 만들고 있다.

▲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식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식에서 416합창단이 공연하고 있다 ⓒ 4.16연대
'기억과 다짐의 문화': 망각에 저항하는 실천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기억문화의 불모지였다. 역사를 기억하기보다는 묻어두고 잊는 쪽을 택해온 사회였다. 진실은 종종 외면당했고, 책임은 시간 속에 흐려졌다. 권력은 자주 망각을 통해 책임을 피했고, 우리는 그런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반면, 독일은 기억문화를 가장 활발하게 실천하는 나라로 꼽힌다. 제도적으로 청소년들에게 가해의 역사를 의무적으로 교육하고, 이를 통해 기억하고 책임지는 윤리적 태도를 길러내고 있다. 여전히 영화, 문학, 기념공간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 기억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기억문화'는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콘텐츠 그 이상이다. 기억문화는 한 사회나 공동체가 역사적 사건이나 집단의 고통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방식으로 재현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고 계승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공통된 문화적 구조이자 실천 방식이다. 추모와 기록, 의례와 예술, 공간과 언어를 통해 이뤄지는 이러한 문화는, 잊지 않기 위한 노력 그 자체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미래를 준비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 기억 문화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주 4.3, 광주 5.18 항쟁의 희생과 교훈을 기억하는 시민들에 의해 기억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는 망각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를 지속해왔다. 제주 4.3과 광주 5.18 항쟁을 폄훼하고, 그 기억의 자리를 지우려는 시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망각의 시도들이 누적되어왔음을 시도를 시민들은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국민적 참사였던 세월호 참사를 겪자마자, 시민들은 망각의 시도에 맞서 '기억하겠다'고 약속했다. 참사의 희생을 잊지 않고 의미를 되새김질하려는 시민들의 기억 문화는 더욱 크게,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호는 단지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윤리적 태도와 실천의 일부가 되었다.
매년 4월 16일,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세월호 기억식은 그 연속선상에 있다. 우리는 추모식에 참여해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실을 느끼는 피해자의 슬픔에 공감하고 애도함과 동시에, 한 자리에 모여 세월호참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 변화를 다짐하는 기억과 약속의 시간을 가진다. 이 집단적 실천은 사회 전체가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는 윤리적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기억은 기록을 통해, 그리고 재현을 통해 살아 있는 현실이 된다. 단 한 번의 다큐멘터리, 한 권의 책, 한 편의 연극도, 그 안에 담긴 진실과 감정은 사람들의 마음에 다시 말을 걸고 불을 지핀다. 곧 기록과 재현은 망각에 맞서는 저항의 언어이며, 권력이 피하고 싶어 하는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사회적 실천이다.
이렇게 함께 서사를 재구축하고, 기억을 사회적 동력으로 재생산해오며 지난 11년간 우리 사회에 조용하지만 깊은 변화를 일으켜왔다. 세월호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기억문화를 스스로 만들고 이끄는 사회가 되었다. 기억은 실천이며,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세월호는 끝나지 않을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잇는 힘은, 살아남은 이들의 실천이며, 함께하는 우리의 다짐이다.

▲"기억하는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약속시민대회 광장 분필사진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약속시민대회"기억하는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에 참여한 참가자가 바닥에 분필로 "remembering is resisting" 기억하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다 라는 문구를 적었다. ⓒ 4.16연대
끝으로: 기억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연대, 세상을 바꾼다
1930년 3월 12일, 인도의 마하트마(위대한)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소금행진'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가들은 소금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것이 독립운동이 될 수 있냐며 회의적이었다. 실제로 첫 날, 간디와 함께한 사람은 70여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간디가 옳았다. 행진이 계속 될 수록 더 많은 이들이 동참했고, 마지막 날이 되자 간디 여정에 연대한 수 만명이 함께 하고 있었다. 영국정부는 이 거대한 연대를 막을 수 없었고, 결국 간디와 협상에 나서 모든 정치범을 석방했다. 작은 소금 결정들의 연대가 거대한 파도를 만든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 피해자 가족을 돕기 위해 팽목항으로 달려가고, 어떻게든 힘이 되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비웃었다. 가봤자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고작 노란리본이 무엇을 바꾸겠냐고. 그러나 그들은 실천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이 연대를 만들어냈다. 연대는 연대를 낳고 또 다른 연대와 결합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진실을 찾는 여정은 간디의 여정처럼 힘들고 어렵겠지만, 기억하고 실천하는 이들의 존재야말로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은 물론, 생명안전사회라는 대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사회가 세월호참사의 교훈을 잊지 않은 이유. 그리고 세월호참사의 교훈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유.
우리가 찾은 답은 바로 이것이다. 기억하는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4.16연대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세월호참사 11주기를 맞아, 10주기에 발행된 <4.16운동 중장기전망보고서>를 바탕으로 지난 11년간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운동과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그 의미를 되돌아 보려 합니다. 이 글은 4.16연대 사무처 활동가들이 함께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