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윤석열 내란 사태 고개 숙인 국무위원들, 끝내 사과하지 않은 김문수한덕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2024년 12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 윤석열 대통령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 내란행위 관련 긴급 현안질문에서 12.3 윤석열 내란 사태에 대해 허리 숙여 사과했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 유성호
"히틀러를 제국 대통령으로 만든 독일 국민의 우매함을 우리가 되풀이해선 안 된다. 진영 논리의 함정에 빠져 '개딸 전성시대'라는 광란의 시대를 또다시 허용해선 안 된다" - 4월 28일 전병헌 새미래민주당 당대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후보 경선에서 89.77%를 득표한 사실에 아돌프 히틀러를 가져다 붙인 말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독일의 대통령이었던 적이 없다. 히틀러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는 했다. 3명의 후보가 대결한 1932년 4월 대선 결선 투표에서 히틀러는 36.77%를 득표해 53.05%를 얻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 패배했다.
흔히들 '히틀러도 선거로 집권했다'고들 해서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 독일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가 있었던 걸로 오해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것은 1933년 1월 31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수상으로 지명되면서부터다. 지명 당시 나치(NSDAP)는 제1당이긴 했지만 국가의회에서 33.6%의 의석을 차지, 독자적으로 권력을 잡을 순 없었다. 당시 의석 비율은 사회민주당(SPD) 20.7%, 공산당(KPD) 17.1%, 중앙당 12.0% 국가인민당(GNVP) 8.7% 등으로, 나치 중심의 과반 연립정부 수립도 어려웠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기로 했다. 총선 날이 다가오던 2월 27일 국가의회 방화 사건이 터졌다. 히틀러는 이를 공산당의 '붉은 혁명'으로 규정하고, 힌덴부르크의 서명을 받아 '독일의 모든 문화와 관련된 문서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 조치'라는 대통령의 긴급명령을 발동했다. 이 긴급명령을 근거로 나치의 돌격대와 친위대가 경찰 보조부대로 동원돼 공산당과 사민당 당원들을 잡아 폭행하고 고문하고 구치소에 가뒀다.
이같은 공포 분위기에서 치러진 3월 5일 국가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전체 의석의 44.5%를 차지, 극우민족주의인 국가인민당과 연합해 겨우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탄압의 대상인 사민당은 18.25%, 공산당은 12.32%, 중앙당은 11.25%의 의석을 확보, 지지 기반을 지켰다. 히틀러의 기대에 못 미친 결과였다.
이렇게 보면, 독일 국민이 총선에서 나치를 제1당으로 만들어 주긴 했지만, 선거 결과가 히틀러의 집권으로 이어졌다고 보긴 어렵다. 히틀러가 수상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를 제어할 수 있다고 오판한 프란츠 폰 파펜 등 보수 정치인들이 힌덴부르크를 설득한 탓이었다.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비상대권 발동을 허락해 히틀러 공포정치의 길을 열어줬다.
"히틀러도 과반 득표한 적이 없는데..."

▲아돌프 히틀러, 위키피디아히틀러가 손을 뻣고 있다 ⓒ 위키피디아
"히틀러도 과반 이상 득표한 적이 없었다. DJ보다 20% 이상 득표율이 높이 올라갔는데, 이런 대한민국 정치는 없었다. 이재명이 당선되면 민주주의가 사라질 것이란 얘기는 선동이 아니고 사실" - 4월 28일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경선 후보
전병헌 당대표의 말이 히틀러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탓이라면, 김문수 후보의 이 말은 일견 맞는 것 같다. 김 후보는 "우리나라에 히틀러 같은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히틀러에 대해 공부를 좀 했다"고 했으니, '독일 국민의 우매함' 운운한 이야기보다는 낫다.
다시 히틀러 이야기로 돌아가서, 히틀러는 3월 24일 수권법 혹은 전권위임법이라고 불리는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 의회의 입법권이 정부로 이양되고 정부가 제정한 법률은 헌법을 위배해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법을 제정하기 위해선 헌법 개정이 필요했는데, 국가의회 의석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공산당과 사민당 의원들을 100명 넘게 국가의회 방화 사건 등으로 체포·구금하고, 중앙당 의원들에게 폭력과 위협이 가해졌다. 나치 돌격대가 의회를 포위하고 난동을 부리는 상황에서 헌법이 개정됐고 수권법이 제정됐다. 이때도 힌덴부르크는 법안에 서명, 히틀러 독재의 길을 열어줬다.
의회 방화 사건은 공산당의 범행이 아니었지만 히틀러는 '붉은 혁명'의 시작이라며 대통령의 긴급명령을 발동했고, 의원들을 체포하고 폭력을 동원해 정당을 탄압했다. 결국 입법부를 무력화하는 데에 성공했고, 다른 정당들은 해산돼 이후 열린 국가의회 선거에선 나치가 전 의석을 차지하게 됐다.
'모르고 하는 얘기'와 '알면서 하는 얘기' 어느 쪽이 더 어렵나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로 나선 김문수 예비후보가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선거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세계 무역전쟁, 관세전쟁에 대응하고 수출로 다시 일어서는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라며 ‘수출 5대 강국 도약’ 공약을 발표했다. ⓒ 유성호
불과 4개월여 전인 지난해 12월 3일 대통령이었던 윤석열은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면서 전시도 아닌데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치인과 법관들을 체포하려고 했으며, 군인을 국회로 보내 봉쇄를 시도했다. '비상입법기구'를 준비한 것에서 국회 해산의 의도까지 짐작할 수 있다.
"히틀러에 대해 공부를 좀 했다"고 한다면, 히틀러가 독재권력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가 대통령의 비상대권 남용 등 여러 유사점이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김문수 후보는 '홀로 사과를 거부한 국무위원'이다. 지난해 12월 11일 국회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이하 국무위원들은 허리 굽혀 12·3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했는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고용노동부 장관이었던 김문수 후보다. 이후로도 사과는커녕 윤석열을 옹호하기만 했다.
공부가 부족해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엔, 관련 사실을 알려주고 바로잡을 기회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충분히 공부를 했는데도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대처하기가 어렵다. 이럴 때 우리는 말한다.
"암만 공부해 봐야 소용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