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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시절의 장준하 1945년 8월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군 OSS 특수훈련을 마치고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의 어느 사진관에서 찍었다. 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선생이다.
광복군 시절의 장준하1945년 8월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군 OSS 특수훈련을 마치고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의 어느 사진관에서 찍었다. 오른쪽부터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선생이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혹독한 훈련이 계속되었다. 요원들이 연병장에 정렬하자 부대장인 소좌가 점호에 나섰다. 손에 붕대를 감은 팔걸이 장준하가 부대장의 눈에 띄었다. 사유를 묻는 부대장에게 장준하는 힘찬 목소리로 특별한 부상이 아니므로 중국전선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였다. 당시 훈련생들은 한국에 남기 위하여 온갖 수단방법을 찾고 있던 처지여서, 일본인 부대장은 부상당한 채로 중국파견을 자원하는 조선인 청년을 가상하게 여겼다.

이렇게 하여 장준하는 결혼 2주만에 일본군에 들어가 훈련을 마치고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떠나기 전 면회 온 아내에게 탈출 계획을 알리고 편지의 마지막이 성경구절 '돌베개'로 되어 있으면 부대를 탈출한 것으로 알아달라고 귀뜸하였다.

이미 며칠 전 면회하러 왔던 아내에게 장차 취할 나의 행동에 대해서 암시를 준 일은 있었다. 중국에 가면 꼭 매주 주말마다 편지를 하마. 만약 그 편지의 끝이 성경구절로 되어 있으면 그것이 마지막 받는 편지로 알아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그 성경구절을 읽고 있을 땐 이미 나는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진영이나 또한 우리 '임정'의 어느 곳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 결심을 말했을 때 아내의 표정이 백지장 같이 변하던 그 모습은 그때 이후 오늘까지 반년이 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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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일행은 기차로 압록강을 건너 3박 4일을 달려 중국 강소성의 서주에 있는 부대에 도착하였다. 신병을 훈련시키는 일종의 보충대였다. 여기서 3개월 반쯤 훈련을 받았다. 총기를 다루는 방법을 비롯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이었다. 장준하와 한인 학도병 출신들은 쓰까다부대로 전원이 전출되었다. 한인 학도병들의 탈출이 심했기 때문에 이들을 격리시키려는 것이었다. 한인출신 학도병들의 탈출이 전무한 이 부대는 그만큼 규율이 엄격하고 회유와 위협이 심했다. 중국 전선에 배치된 일군 부대에서는 학병출신 한국 청년들의 탈출이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쯔까다부대는 더욱 감시가 심하고 훈련도 강하게 이루어졌다.

이 부대에서 장준하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먹을 것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한국인 동료들의 추태였다.

고참병인 일본놈들이 외출갔다 돌아오면 매식으로 배부르니 별로 병영 음식이 먹고 싶지 않아 계란을 깨어서 비벼 몇 젓가락 먹다 말고 선심 쓰듯 밀어 던져주는 밥 한 그릇을 더 받아먹고자 혈안이 된 우리 동료들, 그나마도 대학교육을 받다 입영했다는 처지에….

매식을 하고 들어온 그들이 자기몫을 개, 돼지에게 던져주듯이 던져주는 그 밥한 그릇을 우르르 몰려들어 받아 먹는 그 치사하고 밸 없는 꼴들, 배고픔을 참는 고통이, 이 모욕을 참는 고통보다 심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로서는 이 모욕을 참는 고통이 더욱 쓰라린 것이었다.

동족 지식청년들의 '밸 없는 꼴'들을 지켜보면서 장준하는 몇 동료들과 일본놈들이 먹다 남긴 밥찌꺼기는 먹지 말자는 이른바 '잔반불식동맹(殘飯不食同盟)'을 만들었다.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자존심만은 지키자는 생각이었다. 장준하는 이 부대에서 뒷날 한국육군의 최고 책임자가 된 모 인사의 비굴하기 그지 없는 행태를 지켜봐야 했다. 한국인 탈출병을 찔러죽이겠다고 일본칼을 들고 설치던 그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던 일화를 수기 <돌베개>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일군에 남아 진급하던 그는 한국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선참 일본군 병사들 중에는 한인학병들에게 학대와 멸시를 가하는 자들이 있었다. 장준하가 잔반불식동맹의 주동자라는 것을 안 취사장의 일인 상등병이 "이 더러운 반도놈의 새끼" 운운하며 심한 모욕을 주었다. 장준하는 이날 밤 불침번 근무교대를 마치고 내무반장 우에다를 찾아가 이를 정중하게 항의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담겼다. 한인에 대한 학대와 멸시를 시정시키려는 뜻과 함께 그의 신뢰를 받아 주위에 있는 중국군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생각이었다.

다음날 일인 취사장에게는 3일간 영창의 벌이 내려졌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장준하의 용기와 도전이 승리한 것이다. 더불어 우에다 군조의 신뢰를 받으면서 탈출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알아냈다. 또 야간 전투훈련을 나갈 때는 주변의 지형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탈출할 때의 방향 등을 모색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소득은 중국군 부대가 120리 거리에 있다는 정보였다. 우에다 군조는 아주 상세하게 중국군 부대의 배치를 알려주었다. 장준하는 약속대로 고향의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다른 때와 달리 짤막한 사연을 엽서 한 앞에 적고 그 끝에 로마서 9장 3절을 인용했다. 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는 구절이다.

가만히 엽서를 내 뺨에 비벼대었다. 나의 체온이 묻어나 나 살던 곳으로 전해질 것이라는 생각보다도, 내 감상이 이렇게 해서 위로될 수 있다는 무의식이 나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교회당 앞줄 좌석에 앉아 숨을 모으고 있던 그 어린시절의 내 얌전한 모습 같이, 나는 마음이 가라 앉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이런 생각이, 회오리바람처럼 나를 감싸서 하늘로 치켜 오르게 하는 듯 했다.(장준하, <돌베개>)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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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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