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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투쟁 시절의 장준하 선생(오른쪽)
항일투쟁 시절의 장준하 선생(오른쪽) ⓒ 장호준

장준하는 순백한 청년이었다. 열정이 있었고 정의감이 넘쳤다. 이해득실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물결에 따라 정의와 양식보다 양육강식과 기회주의가 판치는 시대였다. 동년배 조선의 청년들 중에도 기회주의적 처신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 부류가 적지 않았다.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곧 인간의 본질을 말해준다. 위기에 어떻게 처신하느냐는 당사자의 신념과 정의감, 그리고 계산과 타산이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일본 유학시절 학병을 권유하던 이광수와 최남선의 강연을 귓등으로 흘러보낸 그였다. 일본군에 지원하여 요행히 중국으로 파견되면 대륙 어딘가에 있다는 임시정부를 찾아가 독립군이 되고자 하는 꿈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갓 결혼한 예쁜 아내와 헤어지는 아픔이 따랐다. 이를 생각하면 마음을 바꿀까 하는 순간이 없지 않았지만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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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1944년 1월 20일 평양 대동강 건너 사동에 있는 일본군 제42부대에 입대하였다. 이날 함께 입대한 조선인 대학생은 200여 명이었다.

일본말 성경과 독일어 사전, 희랍어 성경과 사전 이렇게 네 권을 든 학생모 학생복 차림의 장준하가 정주역에 닿았을 땐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정주는 그가 동경으로 가기 전 3년 동안 교원 노릇을 하던 곳이었다. 때문에 적지 않은 친구와 선배들이 있었지만, 막상 입영을 하는 마당에서 모두가 쌀쌀한 대상들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 보면, 그도 그럴것이, 요란스리 엇갈려 멘 무운장구의 띠며 일장기의 바탕에 온통 싸인을 받아 머리에 동여맨 입영자들과 비교해서 아무도 그를 입영자로 볼 사람이 없었을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안장도, '다스끼'라는 멜방도, 그 무운장구의 띠도, 또 '히노마루(일장기)'의 머리끈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전쟁 중의 물자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시골에서 입영을 위해 '축하한다'는 플래카드들이 지방관청과 유지들로부터 마련되어 보내 왔건만, 그는 그것들을 몸에 한번 대어 보지도 않은 채, 몽땅 집 아궁이 속에 넣어 버렸다. 그것들이 활활 타버릴 때 이미 그는 입영지원을 마음속에 불살라 버린 것이다.

장준하는 일본군에 지원하면서 이미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입영에 따르는 군국주의 상징들을 불태워버렸다. '입영지원'도 마음속으로 불살랐다. 지원서에 도장을 찍고 고향을 떠날 때 환송연에서 "나는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해서 꼭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 환송객들은 의례적인 인사말로 받아들였겠지만, 장준하는 '꼭 그 일'을 가슴 깊이 새기고 고향을 떠났다.

평양 제42부대에 입소한 장준하는 제식훈련을 마치면 맨 손으로 말똥을 치우고 말발굽을 닦아내는 일을 맡았다. 혹한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 때의 울분은 지필로 기록할 수가 없지만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한 것이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손발에 동상이 걸렸다. 장준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의 동상이 특히 심하여 고통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가슴속에 지닌 성경을 꺼내 읽으면서 견뎠다.

어느날 참다 견디다 못해 찾아간 의무실의 일본인 의무관은 마취제도 없이 맨 살을 다섯 번이나 찢었다. "내 살이 쪼개지는 소리가, 나의 조국이 베어지는 소리로 들렸다."라고 뒷날 장준하는 회고했다.

엄지손가락을 다섯 번이나 찢는데도 꿋꿋이 참는 장준하에게 "내 외과의사 생활 10여 년에, 너 같은 지독한 놈은 처음 본다. 장하긴 장하다. 독종이구나."라는 일본 육군중위 계급장을 단 의무관과 대결에서 이겼다는 승리감이 맨살을 찟는 아픔을 견디게 했다.

입영한 지 한 달 동안 어머니와 아내가 한 번 그리고 아버지가 한 번 면회를 왔다. 가족의 면회 날에는 교련을 면하기 때문에 매일 면회를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 조선인 교련생들이 중국전선으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준하는 뛸 듯이 기뻤다. 중국으로만 파견되면 중경 어딘가에 있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탈출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병에 지원한 것도 이를 위한 수단이었다.

입영 4주일이 되는 날 아침식사가 끝나자 교련생 전원에게 완전군장을 갖추고 연병장으로 모이라는 전달이 왔다. 장준하는 부상당한 손에 붕대를 감고 오른손을 잡아매 목에 걸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배낭을 꾸리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중국으로 가는데 선정되기를 바랐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실록소설장준하#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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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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