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전 대통령 만주군 혈서 지원 사실을 보도한 <만주일보> 1939년 3월 31일자 신문. 붉은 색 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해당 기사 부분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학도병 지원에 두 부류가 있었다.
박정희의 만군입대와 그 행적과 관련한 <친일인명사전>의 기록이다.
훈도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했으나 일차 탈락하고, 당시의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되었다.
기사 전문에는 "29일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 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奉公)'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를 봉입(封入)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중략)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 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이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군관학교 지원의 동기와 좌절된 사연을 미담으로 소개했다.
기혼자인 데다가 연령 초과로 입학 자격이 문제되었으나 다시 도전하여 결국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에서 4년제 만주국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을 치르고 1940년 1월에 15등으로 합격했다. 만계(滿系:일계(日系) 외 통합분류) 합격자 240명 중 조선인은 11명이었다.
자격 제한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사자의 강고한 지원 의지와 함께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 교련배속장교로 있다가 전임하여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의 추천, 그리고 대구 출신으로 신경군관학교 교관부에 일시 근무하고 있던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인 강재호 소위(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세칭 봉천군관학교 4기)의 도움이 있었다.(<친일인명사전 2>)
박정희가 입교한 만주군관학교는 괴뢰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현 장춘) 교외 라라둔(拉拉屯)에 있었다. 일명 동덕대(同德臺)라고도 불렸다. 제2기생은 만계와 일계가 각각 240명 씩 도합 480명이었다. 조선인은 모두 11명으로 만계에 포함되었다.
일제는 괴뢰만주국을 세우면서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 전체를 경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漢)족, 만주족, 몽골족, 조선족, 일본족 즉 '오족' 중에서 우수한 청년을 뽑아 간부 군인으로 양성하고자 군관학교를 만들었다. 또 '오족협화회'를 조직하여 어용기관화하고, 고급관리 양성기관으로 '대동학원'을 설치했다. 여기 출신으로 대표적인 인사는 전 대통령 최규하를 비롯, 서정귀·황종률·고재필·이충환·김병화·안광호·정범석·김규인·김사수 등이 있다.
만주군관학교 1기생 조선인 중에는 이주일·김동하·윤태일·박임항·방원철 등 5명이 박정희가 주도한 5·16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쿠데타에서 주로 병력 동원의 중요한 역할을 하여 큰 기여를 했지만, 쿠데타 성공 후에는 권력투쟁 과정에서 대부분 박정희·김종필 세력에게 거세되었다. 박정희의 동기생 중에는 이한림이 있었으나 그는 쿠데타 저지에 나섰다가 역시 제거되었다.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들어간 박정희는 제3련(連) 제3구대에 소속되어 군사훈련을 받고 1942년 3월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일계 2명, 만계 2명과 함께 우등생으로 선정되어 만주국 황제 부이의 금장 시계를 상으로 받았다. (<만선일보>의 기사다. 이 신문은 당시 만주에서 발행된 한글신문이다.)
북변수호의 전위에 당하는 국군의 지도자가 되려고 호국의 열정에 타면서 2개년의 과정을 마친 금년도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생도 강견상언 (岡見尙彦) 이하 OO명의 졸업식은 23일 국도교외 라라둔 동덕대 륙군군관학교에서 성대히 거행되엇다.……동 교정에서 우대신 집행의 관병식을 한 후 졸업생 일동은 동교 무도장에 정렬, 생도 대표 강견상언(岡見尙彦), 소산중가(小山重嘉) 양군의 강연, 유·검도의 연련, 측도작업의 실습 등을 하였다. 이리하야 열한시 50분부터 다시 교정에 정렬한 후 졸업증서 수여와 … 빛나는 우등생 강견상언(岡見尙彦) 일계(日系), 소산중가(小山重嘉) 일계(日系), 고목정웅 선계(高木正雄 鮮系)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하였다.(<만선일보>, 1942년 3월 24일치)
이 기사에 나오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가 창씨개명한 박정희다. 다카키 마사오는 대구사범 때에는 꼴찌 수준에서 뛰어넘어 240명 졸업생 중에서 수석졸업의 우수성을 보였다.
덧붙이는 글 |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실록소설 장준하]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