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숭아 나무 그늘에 앉아 메아리의 꽃밭을 그렸다. 앞쪽이 꽃밭이고 뒤쪽이 '묘하나골' 산이다. ⓒ 오창환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 ⓒ 오창환
나는 어반스케쳐다. 어반스케쳐는 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느끼며 그림 그린다. 사진을 찍어 그대로 모사하는 것보다는,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현장에서 그리는 경험을 소중히 한다. 어반스케치의 대상은 한정되지 않는다. 삶의 편린을 담은 소소한 정물, 익숙한 주변 풍경, 여행지의 이국적인 장면까지 모두 그린다.
나는 일산과 화정 사이, 대장동 전원마을에 살고 있다. 여러 가지 불편함도 있지만, 자연이 주는 혜택을 매일 누리며 산다. 주택에 살면 겨울엔 아파트보다 더 춥지만, 어둠이 깊을수록 별빛이 밝듯, 봄이 오면 온 동네가 파릇파릇 살아나는 풍경에 마음이 설렌다. 따뜻한 햇살 아래 작은 풀꽃 하나까지 반짝이는 걸 볼 때, 나는 이곳에 살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늘 이 풍경을 그리고 싶었지만, 모르는 사람 집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가는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 십상이라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 집에서 그리고 싶지는 않고, 현장에서 그리고 싶은데 말이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는데, 집 근처 대장동에 메아리쌤이 꽃밭을 가꾼다는 소식을 들었다. 게다가 그 꽃밭에서 모여 함께 그림을 그리자는 제안까지 받았다.
첫 모임 날, 꽃밭을 보는 순간 내 기대는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평화로운 전원마을, 밭 사이를 지나 묘하나골산(대장동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메아리쌤 꽃밭이 있었다. 비닐하우스와 넓은 꽃밭은 개인이 가꾸기에는 꽤 규모가 컸다.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쌤, 이 넓은 꽃밭을 어떻게 가꾸신 거예요?"
메아리쌤은 웃으며 대답했다.
"제 무릎 관절이랑 바꾼 거예요.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죠."

▲비닐 하우스 안에 있는 샤인머스켓 나무. 죽은 나무 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싹이 난다. ⓒ 오창환
꽃밭에는 장미가 많았고 이제 막 튤립과 수선화가 촉을 틔우고 있었다. 나는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샤인머스캣 포도나무를 그렸다. 겨울을 지나 마른 가지로만 남은 모습은 죽은 나무처럼 보였지만, 봄이 오면 새싹이 트고 여름이면 포도가 열린다고 한다. 이 황량하고도 생명력 있는 포도나무를, 내가 좋아하는 작가 에곤 쉴레의 풍경화를 떠올리며 그렸다. 나중에 포도가 열리면 또 그려야지.

▲묘하나 골 산에 있는 진달래와 진달래 그림자. ⓒ 오창환
다음 모임에서는 산에 핀 목련꽃을 꺾어 차를 만들기 위해 묘하나골산을 올랐다. 신록이 우거지고,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이 동네 산들은 높지는 않지만 방문자가 별로 없어 조용하고 호젓하다.
등산객이 적으니까 소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서 마치 스펀지 깔판을 깔아 놓은 것 같다. 걷는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부드럽다. 새소리가 들리던 산길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길에, 흐드러진 진달래꽃 앞에 발길을 멈췄다.
하늘하늘한 진달래는 선을 가늘게 그려야 제맛이다. 맑은 수채화로 색을 얹고, 바람이 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물감을 튀겼다. 그림을 그리는 저널 북에 진달래 꽃가지 그림자가 비쳤다. 검은 먹으로 꽃그림자를 그렸고, 진달래 색으로 번지게 했다. 자연스러운 번짐이 오히려 바람과 꽃의 움직임을 닮았다.

▲처음 갔을 때 잎만 있던 꽃 양귀비가 예쁜 꽃을 피웠다. ⓒ 오창환
처음 방문했을 때 아기 싹만 보였던 개양귀비가 드디어 꽃을 피웠다. 붉은 꽃도 예쁘지만 수북하고 탐스럽게 피어나는 잎도 예쁘다. 싹 틔운 모습과 꽃 핀 모습을 각각 그렸다. 울타리 옆에 있는 풀이름을 메아리 쌤에게 물어보니 잎이 톱날을 닮아서 톱풀이라고 한다. 톱풀을 심어 놓으면 잡초가 잘 안 자란다고 한다.
"톱풀은 잎에 잔잔한 톱날 모양의 톱니가 있어요. 더 자라면 작은 하얀 꽃도 핀답니다."
예쁜 꽃이나 풀은 눈으로만 감상하기에는 좀 아쉽다. 나는 종종 손으로 쓰다듬기도 하고 이파리를 조금 뜯어서 손가락으로 뭉개서 냄새를 맡기도 한다. 튤립 이파리는 두툼하고 푹신하다. 양손으로 톱풀을 모아서 쓰다듬으면 적당한 부피감과 탄력성에 기분이 좋아진다.
기사에 쓸 꽃밭 전경을 그리기 위해 다시 꽃밭을 찾았다. 울타리를 이루던 조팝나무와 벚나무는 이미 꽃이 지고 있었다. 대신 핑크색 패랭이꽃이 만개했고, 노란 수선화와 온갖 색의 튤립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꽃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꽃밭 옆에는 염소 몇 마리를 키우는 사육장이 있고, 닭도 있어 종종 우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 동물들의 소리가 서로 얽혀 하나의 자연 교향곡을 이룬다. 그림을 그리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어느새 나도 이 풍경의 일부가 된다.
원래는 한 달에 한 번 그림 모임을 하기로 했지만, 야외 요가 수업도 함께 하기로 하면서 매주 모이게 되었다. 나는 집이 가까운 덕분에 평소에도 수시로 꽃밭을 찾아 그림을 그린다.
어반스케치의 매력은 사물을 직접 보고, 관찰하고, 응시하고, 명상하는 시간이다. 갑자기 비가 오거나 햇살이 뜨겁게 내려쬐는 것이 때로는 불편하지만, 그런 변화까지 모두 끌어안고 그리는 것이 어반스케치의 즐거움이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그림을 그리는 순간, 세상의 번잡함은 모두 잊혀진다.
꽃밭을 오가며 생각했다. 이 동네만 해도 꽃밭을 가꾸는 농가가 꽤 많다. 일부러 꾸민 농장보다는, 스스로 즐기기 위해 만든 자연스러운 꽃밭이 훨씬 매력적이다. 지나는 길에 들여다보고 싶지만, 주인의 허락 없이 들어가긴 어렵다.
그래서 생각했다. 꽃밭 주인들이 특정 시간에 꽃밭을 개방하고, 입구에 "구경하셔도 됩니다"라는 팻말을 걸어두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대장동 꽃밭 투어' 같은 프로그램도 가능할지 모른다.
올해는 고양시의 자연과 생태, 꽃과 나무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꽃을 더 많이 관찰하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향유하고 싶다. 꽃에 대한 연구도 더 깊게 하고, 이름도 익히고, 나아가 꽃에 관한 글도 써보려 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내 그림과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고양신문에도 실립니다.